프로필
정년퇴직을 하고 지내온지 십 사년 시간이 지났다.열심히 일을 하였고, 놀 줄도 알면서 예까지왔다. 모아둔 사진을 꺼내며 나를 되돌아 보는 지금이다.크게 이루워 놓은게 없어도, 뭐 잘 하는게 없어도 그저 최선은 다 했다.더 진솔하게 살고 싶다.항상 내 부족해도 받아들이면서 웃으며 살아 갈 것이고 비굴하게 살고 싶지는않다.내 이렇게 했음 좋겠다는 얘기 기록해두고,나와 끈이 묵여져있는 가족들 쉽지는 않겠지만 끝까지 챙겨 줄것이다.건강이 따르고 돈이 모아지면 바깥나라 여행도 더 할것이다. 오늘 좀더 줄이면서 보완하며 blog를 다듬고 간결하게 만들고 있다.손에 쥔 모든것을 써야 한다 ㅡ 십여년간 수정하며 보완해온 글과 사진을 오늘 다시 정리를했다. 2019.02.17 하기
나는 육군 갑종간부후보생 229기로 1년의 육군 장교 정규교육을 이수한 후 육군 포병소위로 임관하여 베트남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대한민국의 전 후방 각 부대에서 16년을 복무하였다 그후 육군소령으로 전역한후 곧 바로 국방부에서 임용한 5급 군무행정사무관으로 특채되어 국방부 예비군육성 분야에서 22년을 근무하여, 총 38년간을 대한민국 국방분야에 헌신한 후 정년퇴직을 하였다. 그때 내,나이 오십팔歲에 공직에서 물러나며 공무원 연금 수급자가 됐다.
베트남 전투참전<맹호사단에서 포병장교로 12개월 참전> [1971년 6월26일 ~ 1972년 7월4일]
맹호사단 제1연대 1대대 4중대 관측장교 5개월 역임 [1971년 7월.~ 1971년11월] 맹호사단 제60 포병대대 A포대 전포대장 7개월 역임 [1971년12월 ~ 1972년 7월]
맹호18호작전[고보이 평야 매복소탕작전]을 6일간 마치고(소총중대 관측장교 마지막임무) 기지로 무사히 귀환한 모습들이다.습지를 파고드는性器처럼 그렇게 치열하게 매복후싸웠다. 죽어가는 전우가 후송되는 긴박함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어야 하는 전쟁터의 생리를 체험 했던 작전이었다.이제야 큰 고비를 넘긴 셈이다. 극한 상황을 3번 넘긴 그렇게 길었던 5개월 동안의 관측장교 근무였다. 12회에 걸쳐 보병 소총 중대장에게 포병화력을 제공하며 작전을 잘 마무리하게 하였다. 이제 보병소총중대 관측장교 생활을 마치고 포병장교의 본연의 임무 를 수행하러 맹호사단 제60 포병대대 A포대 戰砲隊長 으로 보직을 받아 자리를 옮기게 됐다
베트남 전쟁터에 파병될때 부친께서 당부 하셨던 3가지 말씀이 있었다. 첫째,돈에 욕심 내지 말고. 둘째,여자를 조심하고, 셋째,병사를 핏줄처럼 아끼라는 것이었다. 이 말씀을 늘 잊지를 않고 베트남 전쟁터에서 생활을 했다. 맹호사단 60포병대대 A포대 기준 3포반원<포반장 이상윤중사>과 함께한 전포대장<송정학중위>. 어느날 하룻밤에105미리 곡사포 700 여발을 발사했던 기억이 생생하다.대포를 M16소총 쏘듯이 쏘았으니까... 나는,105미리 곡사포 6문을 사격 통제대 위에서 지휘했던 전포대장(戰砲隊長)직을 베트남 전선에서수행했다. 참, 우직하게 대포만 쏘며 고막이 찟어지는 아픔도 있었다, 베트콩이 쏘아대는 박격포 공격을 진지 안에서 받 았으며 즉각 대포병 사격으로 반격도 했었다, 참 지독스레 대포를 쏜다는 소리를 들으며 프랑스1개 연대가 몰 살 당했다는 베트남의 중부 도시[퀴논 풋캇성] 죽음의 미츄안 계곡을 지켰다.내,포대원 전원은 건강하게 귀국 을 모두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여한 월남 참전기장과 베트남정부가 수여한 베트남 참전기장 정년 퇴직 그후
정년퇴직을 했다. 일할 힘이 아직 남아 있으나 제도가 그 힘을 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동안 많은 일을 했으니 집에 가서 쉬라고한다. 20,30과50,60 이라는 말이유행어가 된 요즈음, 내후년이면 인생 60이 이제 막 시작되는데 나는 무슨 일을 어떻게 하면서 살아야 하나싶다.
아나로그 적 사고를 하고 있는지도 모를 내가 디지털 시대에서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하나,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한 때도 많았다. 나는 내 삶을 위해 근거 없는 이론을 또 하나 기억해 낸다. "가장 좋은 삶이 되려면,일생 동안 직업을 세 번 이상 바꾸어야한다"라는 것이, 그것이다. 이 말은 현재의 나에게 많은시 시사점을 던져 주고 있다고 생각 된다. 내 첫 번째 직업은 21세 나이에 군복을 입고 16년 동안 근무, 육군소령으로 전역한 직업 군인이였다. 내 두 번째 직업은 국방부장관이 임용한 5급 軍務 行政 事務官으로 22년동안 국방부예하 제50 보병사단에서 예비군 동원업무 분야을 다룬 5급사무관이였다. 행정고시를 치루워 최초 5급 사무관에 임용된 일반직 공무원은 승진이 되는데 특채된 분야의 사무관은 아무리 업무를 처리해도 4급 서기관이나 3급 이사관으로 승진할 수 없는 규제 틀 속에 갇혀버린 공직생활자 였다. 그래서 솔직히 더 능동적이지 않고 대부분의 동료들은 설 치지 않고 최선을 다하며 근무를 했는지도 모른다. 건강에 신경쓰며, 그래도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는건 근무중 50 사단을 대표하는 모범사무관으로 선발되여 부부가 함께 청와대에도 초청 되여 극진한 대우속에 정부에서 주관하여 시켜주는 해외 산업 여행도 했었고... 솔직히 근무중 늘 긴장하며 선두에 서서 모든 동료와 후배들께는 귀감이 되였 던 생활을 했다. 그렇게 총 38년 동안을 나 자신과 국가를 위해 일한 셈이다.지금 예까지 와서 투덜대면서도 그래도 나를 잘 뒷바라지 해준 아내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힘겨웠지만 열심히 국가를 위해 봉직했고, 국가유공자로 선발되어 훈장도 받아 들고, 58세의 나이에 정년퇴직을 하게 된 나는, 집에 가서 쉬라는 강요 아닌 강요를 받은 후 나는 새로운 도전을 가능케 하는 신종 직업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나에게 걸 맞는 세 번째 직업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극도로 고심도 했다. 그러나 이내 나는 정말 한없 이 행복한 친구라는 걸 알게되였다.58세 까지 정말 열심히 같은 분야에서 일하면서 건강할 수 있었으니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이제 튼튼한 두다리 더욱 단단하게 유지시킬 여유를 찾고 정신건강을 살 찌어야 겠다. 사랑도 해봐야 겠다. 꼭 그렇게 살찌우는 건강한 사랑을 해 보고도 싶은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렇다.편안하게 마음 갖고 운동 열심히 하고, 지금껏 국가를 위해 봉사했다고 평생 주 어지는 공 무원 연금수급자가 되여있는 나 宋正學 이다. 이제부터 月 이백 오십만원이 주어지는 연금수급자가 되였고 매년조 금씩 인상 금액이 합쳐 주어지겠지만 씀씀이 조금만 줄이면 생활이 그렇게 지독스리 궁핍하지는 않을 것이고,지금 처럼 국가에서 실시하는 직업교육 프로그램에 참여, 생활교육과 취미교육을 습득하고 즐기면서 내 생활을 하면서 초라하지않고 당당하게 지금처럼 열심히 살아간다면 세 번째 직업이주어질 것이고 받아 들일 것이다. 머리로 하는 하는 일 보다는 힘으로 해야하는 우직한 일은 있을것이다. 맞짱 떠보는거다. 그것이 세번째로 내가 해야 할 소일이 될것이다. 못했던 해외여행도 많이 다닐 것이다.
남이 인정하지 않으면 어떤가. 내가 나를 인정하면 되는것이 아닌가. 일할 힘이 내 마음속으로부터 솟아 오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남에게 고용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고용하면 되는 것이다. 대문을 지키든, 물건을 나르든, 심부름을할 수 있는 일들이 있을것이다.60 대를 위한 신종 직업의 종류가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이 사회는 더욱 기 름질 것이다. 숨겨둔 자기 능력과 욕망에 합당한 새로운 직업을 가진 사람이면 비록 60 대지만, 마음은 언제나 20, 30 대 일 수있지 않겠는가, 60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변하는 세태에 민감해야 한다는 것 이라 생각한다. 인간은 20 30 이든, 50 60 이든 특정 방식으로 정의되어 그 정의된 틀 속에 갇혀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 하는것이 바로 "삶의 활력"을 찾는 방법이 아니겠는가. 건강하자. 모든일에 1등은 절대 필요치 않다. 그냥 최선 만 을은 다 하는거다.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 주변을 사랑하는것 일것이다. 2005. 6. 30. 정년퇴직을 하면서... 하기,송정학
정년퇴직 직후 가을. 창녕 화황산을 오르며 필카로 찍힌걸 스켄했던 나에 모습 ( 2005.10.20)
팔공산 깔딱고개 마루에 서서 쎌카로 만들었다.퇴직후 5년이 지난 모습 (2010. 초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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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퇴직 그후 10년 이제 2015년 10월 20일이 되었다. 정년 퇴직을했던 날 부터 꼭 만 10년 4개월이 지났다. 그 동안 하고픈 것을 하며 잘지냈다. 컴공부를했고, 숲해설사. 학교지킴이.차량가이드 도했다. 나이들며 몸에 무딘곳을 알아가며 좋은 의사들 미리만나 찾아서 진료받으며, 님이 나에 주치의요 하며,치켜 세우며 존경하면서 따르며 친하게도 지냈다 그래서,내 몸 구석구석을 어디가 어떻다는걸 안다.자꾸 약해만지는 내 몸 스스로 인정하며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일본, 중국, 대만, 서유럽6국, 동유럽5국, 여행도 했다.사진기 두대 마련하여 사진도찍는다. 처음 시작된 공무원 연금공단에서 지급되는 연금 월액수가 이백오십여만원에서 시작되어 매년 조금씩오르더니 2015년 연금월액이 삼백만이천삼백십원이 되었다.그리고 2020년까지 연금법 개정에 따른 조치로 인상이 5년간 동결되었다는 알림 을 공무원연금지 8월호에 게재되여 알려왔다. 어젠 아내와 밥상머리에서 둘이 밥먹으며 이런 얘기를 했다. 젊었 을때 열심히 일했으니까 크게 만족하지는않아도 매월 연금으로 생활하니 좋아? 했더니,피식웃는다.그러면서 그 것을 남기는 글을 써 두라고 한다. 그것을 명문화 해서 써 두라고 한다. 그래, 맞다.그렇게 할 거다. 정리 해 두고 보강 해볼거다<웰다잉well-dying (좋은죽음) 법률안<연명의료 결정법안>이 2015년 12월9일 국회보건복지위 원회를 통과했다. 국내에서 존엄사 논의가 시작된지 18년 만이다.이 문제에 대한 나에 뜻을 밝혀두려는 것이다>
이제 평일, 휴일 /일욜에는 지하철 열차에 자전거도 함께 싣고 가 생각나는 목적지에 내려서 자전거 종주길을 타 면서 시간 보내며 맑은 공기도 마신다. [컴]도 만진다.사진 찍으며 동호회에도 나간다. 나에게는 부모님 두분이 고향 仁川 에서 알콩달콩 함께 생활하며 계신다. 올해 아버님 연세가 구십하나. 어머님 연세는 팔십아홉 이시다. 나는 늘 마음을쓰며 생활을 해야한다. 이제 나도,이 만큼 나이가 되었다.더 천천히 모든것을 다듬고 싶다.그리고 더 사랑해야지. 모든걸 아끼지 말아야 한다. 나와 인연이 닿고, 맺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말이다. 아 야 야 야~♪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 ♪ 노랫말이 머리를 스친다. 2015.10.20. 하기
퇴직후 만 10년이 지난 2015.10월에 [하기]모습 (김광석 길에서) 퇴직후 만14년이 지난 2018.08월 중반에 [하기]모습 (홍콩 여행 중) ............................................................ 14년 간 아름답게 지나 간 모습들 <2005년 ~ 2019년>
[초행]
[허비][진등]兄들 따라 설악산 대청봉ㅡ공룡능선ㅡ백담사로 첫 산오름을 시작 하였다.(2005.10.20)
숲을 사랑했었고 열심히 다녔다.( 2008, 6.)
세월은 돌 처럼 쌓이지 않고 흘러가는 것
기억 하는 사람이 있는 한 사라지지 않는 것이 역사라는 이름의 장강대하 일것이다. 그러나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니, 기억 또한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이 그 기억을 적어두는 기록이다 - 이현상 평전 발문(김성동)에서- 대구 수목원에서 (2009.9) [기익]이 집에 모인 뿡알 친구들 (2011.6) 이탈리아 여행중 덴마크 여인과 기념촬영 (베네시아 광장에서) <2012.5> 경주 출사 여행 (2013.봄)
중앙공원에서 (2013.3)
월드컵 경기장 뒤 청계산 정상에서(2012.5.) 위 사진은 [허비]兄께서 만들어 보내왔다. (2015.10.08. ) 이 만큼 왔다. 그대로의 민낯이다. 기대지 말자. 다 주려고 말고, 다 받으려 말자.(2017.가을)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당당히 일어섰다. 그리고 다 놓아버렸다.(2019.1.30) [에필로그]
하셨다.어머님 연세 아흔하나(91세).아버님 연세 아흔넷(94세)이 되셨을 때였다.경기도양평 공원묘지에 가족묘를 조성하였다.어머님 아버님 뵙고 싶을때 서울행 ktx를탄다, 서울역에서 용산역에 가면 문산에서 양평으로 가는 서울도시철도가 용산역을 지난다,양평행 지하철타고 양수리 전철역에서 내려 택시를 불러타면된다.이름있는 날을 가능하면 피해가면 좋을듯하다 두 분을 잘모셨으니 큰일은 형제들이 힘 합쳐 잘 처리 했다고 생각이 든다. 고마움을 전한다 내가 세번째 선택한 직업은 근사하지도않고 멋도없이 활동하며 초등학생과 초등학교를 지키 는 학교지킴이 였다. 나는 열심히 그학교와 학생들을 지켰고 만족한 생활을 했었는데 타의에 의해 3년을 남겨두고 2018.9.30.퇴직을 해버렸다. 그 이유는 장기간 병가는 불가능해서였다
북 컴퓨터는 한몸으로 늘 함께 다녔다. 때로는허리가 협착으로 눌려 아파왔고, 어느때는 눈도 침침하고 어깨도 아팠다.정년퇴직 후 4년간의 숲 해설가생활. 3여년 넘게는 동기가 대표하는 사업을 전무직을 줄테니 도와 달라기에 열심히 도왔고, 마무리까지 해 주었다, 7년간은 초등 학교 지킴이 생활을 하였다.7년간의 지킴이 생활에 나는 피곤하고 더러는 망가지기도 했지만, 그것은 이 나이쯤에 접어든 모든 내 또래의 운명일거라 거창하게 생각을 했던 것 같다.그러면 서 할것은 최선을 다 하면서 학교 지킴이 생활을 했다. 그리고 2018년 8월26일 나는 맨 땅에 헤딩을 하면서 넘어졌고 2개월의 병원입원 후 끝내 대학병원으로 옮겨서 머리에 메스를 대야 했다.수술을한것이다.하늘이 돌봤는지 그렇게 머리가 깨졌어도 뇌를 감싸고있는 머리 두피만 손상되여 고여 있던 혈흔을 제거하였고 십일만에 퇴원을 하였다.이상없이 정상을 찾았던거다. 그리고 하던 모든 일들에서 손을 떼었다.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는 소리 듣는 자유인이 되었다. 여행을 더 할것이다. 어딘가에 내가 만나지 못한 행복한 풍경이 존재하는 한, 나는 또 그것을 만나기 위해 이제는 자유롭게 길을 걷는 길의 미식가로 살아 볼 참이다, 내가 모든것을 이겨 냈고 더 건강해야 하는건 부끄러운 생활을하지 않았기 때문일것이다.열심히 일했으니 조금은 천천히 거닐어도 이제 풀어서 쥐고 못했던 일들을 즐기면될것이다.당당하고 씩씩하기만 하자
☎ . 註 ( 학교지킴이가 하는 업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