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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 詩 들

모란 봄날에

by 하기 2 2022. 5. 6.

 

 

 

          2022.4.4. 대구일보 19면 오피니언에 실린 "문향 만 리"

 

 

           [ 모란 봄날에 ]

                                  ㅡ 박진형

 

           느지막이 머리 깎고 해인사 장경각 지킴이 하다가 그 일 또한 심드렁해져 이십 년 남짓

           팔만대장경 한글로 옮겨 적다가 주름만 잔뜩 늘어난 종림 노사에게 어느 보살이 서울

           부암동 먹기와집 한 채를 턱, 하니 시주로 내어놓았습니다. 몇 날 며칠 마음에 담아 두고

           쩔절매다가 그새를 못 참아 해인 편집실로 냉큼 주어 버렸습니다. 풍문에 전해 들은

           보살이 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내달려 와 몇 번 종주먹질해대자 반가부좌 한 종림 스님

           뜬 눈 도로 감고는 거가 거라, 그 한마디에 뜰 귀에 마악 피기 시작한 모란꽃도 제풀에

           그만 지고 말았습니다. ㅡ [고령 문학] (2021, 제25집)

 

 

           ☎ 게으른 사람은 못 하는 게 3, 4월 꽃구경이다. 꽃소식을 전하기 무섭게 단숨에 피었다 지는

           봄꽃들. 개중에서도 모란은 '뚝, 뚝, ' 떨어지고 동백은 '모감모감' 진다.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

           에서 모가지째 떨어지는 모란을 표현하기 위해 청각과 시각을 동반하는 부사 '뚝, 뚝, '을 동원했다면

           고재종은 "백련사 동백숲길"에서 동백꽃이 통째로 떨어지는 모습을 '모감모감' 진다고 묘사한다.

          '뚝, 뚝, '이 환기하는 소멸의 비극성만큼이나 '모감모감'이 전해오는 애잔한 서러움도 만만치 않다.

           이에 비해 박진형의 시에 등장하는 모란은 제풀에 그만 시르죽고 마는 꽃이다. '거가 거라, '라는

           스님의 한마디에 기를 못 펴고 말문을 닫은 보살님이지 않은가. 여기에는 '모란꽃도 제풀에 그만

           지고 말았습니다' 외에 다른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이기심은 탓하거나 두둔할 필요가 없는 인간의 본성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인 무소유는

           이 본성을 거스리라고 가르친다. 빈털터리로 살라는 말이 아니라 얽매임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듣고 말하기는 쉬어도 그렇게 살기란 참으로 어려운 가르침이다. 스님은 그 어려운 일을 해낸

           것이고 시의 감동은 거기서 비롯한다.

 

           인적 없는 자연과 폐쇄된 수도원과 한적한 절간에서 살아가는 삶과, 이승의 저잣거리에서 아득

           바득 하며 살아가는 삶을 수평의 저울에 놓고 단다면 어느 쪽도 무게가 기울지 않다. 중요한 건

           삶의 형태가 아니라 삶의 내용이다. 숲이나 사찰에 샘이 있어서 지나가는 등산객이 목을 축일 수

           있듯, 우리 역시 한 바가지의 시원한 물을 목마른 누군가에게 공짜로 건네야 함이 그래서이다.

 

                                                2022.4.16. 밤에 [하기]는 신문을 읽었다. 그리고 토닥토닥 컴 자판기를 눌러 쳤다.

 

 

 

 

       2022.4.13. 상인동 왕벚꽃 길가에서 담았던 모란꽃

                                                           

           ...............................................................................

 

                [ 4 월 ]
                                ㅡ 김주대 시인
                그대 여기 와서
                실컷 울고 갔구나

                목련꽃이 다 졌다.
                                       

                   ☎ 목련이 지는 날에 생각나는 시 하나.

 

 

 

 

          합천 황매산 철쭉(2022.5.6.)

 

 

 

        고창 청보리밭 (2022.5.6)

 

 

2022.5.6 합천 황매산 철쭉 / 고창 보리밭을 휘돌아 온 날에 편집  :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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