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 아침
쓸쓸한 낙서
- 복효근(1962~ )-
철거지역 담벼락에
휘갈겨 쓴 붉은 스프레이 글씨,
SEX
저것을 번역한다면
‘사랑’이거나 ‘씹할’ 정도가 아닐까
분노와 욕망이 함께 거주하는
저 덜렁 벽 하나뿐인 집
버티고 선 포크레인
그리고 도심의 휘황한 불빛 앞에서
피 흘리듯 흘림체의 저 SEX는
누리고 있는 자가 더 누리기 위한
호사는 아닐 것
애써 다독이며 숨어서 하는 쓸쓸한
수음과도 같은 것
분노하고픈 사랑이여
사랑하고픈 분노여
제 몸을 내어준 벽이 홀로 쓸쓸하다
시 평
재개발 구역에서 집이 비면 붉은 스프레이로 ‘X’ 표시를 해놓는다. 사람이 없으니 허물어도 좋다는 표지다
장난기가 동했는지, 누군가 그 앞에 ‘SE’ 자를 덧붙여 놓았다. 한번 해보고 싶다는 고백이다. 세상의 모든
화장실 벽이 품고 있는 바로 그 고해성사다. 남자들은 이상하기도 하지. 왜 바지만 내리면 그 생각이 나는
걸까? 하지만 모두가 떠나고 없는 빈집에 대고 하는 저 고백이야말로 옛사람에 대한 고백이 아니겠나. 그에
대한 사랑과 분노가 저렇게 붉은 “흘림체” 로 남아있는 것 아니겠나. 그렇다면 “애써 다독이며 숨어서 하는
쓸쓸한 수음” 도 회상의 한 형식일 터.대청소를 하다가 우연히 열어본 앨범 앞에서 넋을 놓고 세 시간째 앉
아 있는 주부와 똑같은, 그런 심사일 터. <권혁웅·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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