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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 詩 들

김태훈의 알콩달콩 詩 [아내에게 배우는 "새로운 삶"] 작은 밭

by 하기* 2015. 9. 18.

 

 

 

 

 

          [김태훈의 알콩달콩 詩] 아내에게 배우는 '새로운 삶'

                                                                                      발행일 : 2015.09.17 /  조선일보 주간매거진 D4면

 

 

              [작은 밭]


                  평생 아이들 자라는 것만 보다가
                  퇴임하고 들어앉은 나에게
                  허구한 날 방구들만 지고 있으면 어떻하냐고
                  아내가 불쑥 내민 호미 한 자루
                  하느님, 나는 손톱 밑에 흙을 묻혀본 적 없고
                  상추 한잎 이웃과 나눈 일이 없습니다
                  아내가 얻어놓은 작은 밭이랑에
                  어떻게 아이들을 심을까요
                  내 서툰 호미질이
                  어린 상추싹을 다치게 할까 걱정입니다

                                                              - 정희성 시인 -

            남자들,  가족 앞에서  "회사 생활이 얼마나 힘들고 대단한 일인지 아느냐"고 으스대지 맙시다. 회사 다닌다며 다른 일엔 나

            몰라라 했던 것, 가슴에 손 얹고 반성해야 합니다. 사실 회사가 가정 안팎의 온갖 공격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울타

            리 노릇을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 정년퇴직은 무엇인가요. 그 보호 밖으로 나간다는 의미입니다
             많은 퇴직자가 토로합니다. 집에 들어앉고 나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당연합니다. 회사 일만 알았지 나머지 세상

             돌아가는 일엔 무관심했으니까요.  반찬 하나 변변히 할 줄 아는 게 없습니다. 아이들이 몇 반인지,  무슨 학원 다니는지도

             모릅니다.  인간관계도 회사 동료에 국한되다 보니 퇴직 후 만날 사람도 없습니다.  그 순간 아내를 다시 보게 된다고들 합

             니다. 정년퇴직은 회사 밖에서 사는 법을 아내에게 배워야 하는 새 삶의 출발점입니다.

             정희성 시인은 서울 숭문고에서 35년간 제자를 가르치고 2007년 퇴직했습니다.

             그도 다른 가장들처럼 방구들의 친구가 되었나 봅니다. 그런 남편에게 아내가 밭이라도 가꿔보라며 호미를 내밀었습니다.

             손에 호미를 쥐고서야 시인은 서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지난 인생, 손톱 밑에 흙을 묻혀본 적 없었고 이웃과 정을

             나누는 일을 해본 적 없는 숙맥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남자들, 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회사에서 돈 좀 벌어온다고 자랑하지 말고 미리미리 회사 밖에서 사는 제2의 인생을 아내

             에게 배워둬야 하겠습니다.맞벌이 가정의 퇴직 후 풍경도 다를 것 같지 않습니다. 회사 다니는 아내들은 남편이 귀가해 퍼

             져 있는 동안에도 주부의 일을 감당해왔으니까요.
             정희성 시인의 작품에는 노년 부부의 모습이 여럿 등장합니다.  시인이 눈 내린 태백산 등산을 떠나자 아내의 입에서 고운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등 뒤에서 아내가 구시렁댄다 / 지가 열일곱살이야 열아홉살이야'(태백산행). 남들이 남편을 두고

             "학 같은 시인"이라고 칭찬하자 부인은 '지가 살아봤냐고 학은 무슨 학, 닭이다 닭, 닭 중에도 오골계 (烏骨鷄)!' (시인본색)

             라고 빈정댑니다.
             이걸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오랜 시간 함께하며 산 아내의 속정을 모르는 겁니다.   '태백산행' 에서는 남편의 안위를

             걱정하는 아내의 마음이, '시인본색'에는 "세상에서 내 남편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라는 자신감이 녹아 있습니다.

             이렇게 남편을 위해주고  속속들이 아는 아내가 내리는  처방이라면 직장 다닐 때 상사의 지시보다 더 고분고분 따라야 합

             니다. 무엇보다 그 처방에는 회사의 업무지시에는 없는 영험한 성분까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호미를 서툴게 쥐고 있는

             남편으로 하여금 다시 용기를 내 새 삶의 밭을 갈러 나갈 수 있게 하는 격려와 응원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 김태훈  ㅡ조선일보 주말매거진3.0 팀장 ㅡ

 

 

 

 

 

 

 

작업을 마친 농기계 트렉터는 한가롭게 쉬고있었다.낙동강변 고령 들녁에서 사진이다. 2015.9.17.오후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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