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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參戰 그後

지금도 진료 중인 보훈병원 의사 선생님께 감사한다.

by 하기 2 2024. 4. 22.

 

 

            베트남 참전(參戰) 그 후(後)

 

 

     지금도 진료 중인 보훈병원 의사 선생님께 감사한다.

 

      ☞ 기고자. 박 병조 (월남 참전유공자)

 

        K- 레이션(K -Ration)을 아십니까?.K팝,K푸드.K컬처 등 우리나라의 각종 콘텐츠들이

       세계무대에서 인기를 끌며 대한민국이 자랑스러워지는 요즘이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베트남 전쟁 당시에는 K-레이션이 인기였다. 필자는 백마부대

       제29연대 10중대 관측장교로 1968년 2월부터 10개월 동안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당시 미국이 공급하는 전투식량은C-레이션이라고 했는데,한국의 김치,고추장 등 전통

       음식으로 만들어진 전투식량에는 알파벳 C 대신 K를 넣어 K-레이션이라고 불렀다.

       베트남 전쟁 파병 초기에는 미국의 전투식량인 C-레이션, 정확히 MCI( Meal, Combat,

       Individual )가 우리나라 병사들에게 공급되었는데,스테이크,비스킷,초콜릿이 우리 입

       맛에 맞을 수가 없었다. 장병 복지에 많은 신경을 썼던 주월 사령관 채명신 사령관이 우

       리나라 음식을 장병 에게 먹이고자 했다.처음엔 김치를 포함하는 것으로 개량된 한국형

       C-레이션이 보급되었는데,일본인이 생산한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었다.이에1967년3월

       우리나라 자체 기술로 개발한 전투식량이 탄생하였는데, 바로 K-레이션이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의 가공 기술은  K -레이션에  포함된 김치 통조림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수준이었다.김치는 쉴 대로 쉬는 데다 김치찌개처럼 물러터지기 일쑤였다.

        쉰 김치와 통조림 캔이 반응하여 녹이 슬기도 했다.적지 않은 문제였지만 "여러분이 이걸 

        안 먹으면 2주 뒤 일본 김치가 도착할 것이고, 김치 값은 일본 사람 손에 간다" 는  채명신

        장군의 말에 장병들은 불평 없이 쉰 김치를 먹었다."우리가 이걸 먹어줘야 한국 가공기술

        이 발전한다". "쉬었다고 안 먹으면 한국 경제 발전이 더뎌진다" 는 생각으로 그 맛이없는

        김치를 먹은 것이다. 미국이 K-레이션을 한국으로부터 구매하여 우리 장병에게 보급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이는 일종의 수출이었다.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K-레이션으로 벌어드린

        금액이 약 5600만 달러 였는데,1968년 우리나라의 수출액이 약 4억6000만 달러 였음을

        생각하면,결코 저지 않은 액수였다.한편은 우리나라의 통조림 제작 기술도 하루가 다르게

        향상되어 가공식품을 해외에 수출하게 되었다.

 

         군인은 쉰 김치를 먹을 때도 나라가 우선이었고, 그 결과 우리나라 수출액이 많이 늘어났고

         가공 기술이 발전했다.군인에게 나라가 우선인 것처럼 의사에게는 환자가 우선이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을 보면 그렇지 않아 보인다.국가유공자의 건강을 책임지는 보훈병원도

         의료대란을 피해 가지는 못한다.필자를 포함한 많은 국가유공자들은 고령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병원을 찾는다.  보훈병원의 전공의들도 사직서를 제출했다는 기사를 접하고, 방문 전

         확인이 필요한 위탁 병원 목록을 안내받으니,아플 때 진료를 받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

         이 앞선다.

 

          국가의 부름으로 참전한 베트남 전쟁에서 필자는 매 순간 살고 싶었다.작전에 투입될 때는

         "높으신 분들이 우리 사정을 1000분의 1이라도 이해했으면 " 하고 원망도 했다.어느 날은

           작전 중 총격소리가 들리더니 무전기 안테나가 총에 맞아 날아 갔었다. 가슴이 철렁했지만

           도망칠 수는 없었다.  그곳이 바로 군인이 있어야 할 곳이었기 때문이다.  전쟁터를 지키는

           군인처럼 묵묵히 본인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하고 계신  보훈병원 의료진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부디 불안에 떨고 있는 환자 곁을 지켜주시기를 바란다.  end.

 

 

   나는 맹호부대 제1연대 제1대대 제 4중대 관측장교로 5개월.

   포병 제60대대 A포대 전포대장(戰砲隊長) 으로 7개월 ( 베트남전 

   참전기간 1971.6.12 ~1972.7.4) 동안 베트남 전쟁에 참전을 했다.

   오늘 신문에 실린 선배 기고문 글을 읽고는  이곳 내 Blog에 옮겨 타이핑을

   했었고 그 내용을 보강해 이렇게 올렸다. 큰 울림이 있어 나에 보배인 知人들

   께 긴 글을 문자로 보냈다.답신을 받았다. 고마웠다.  2024.4.21. 하기,송정학

 

 

              나는, 우리 전우들은 치열하게 이렇게 전투를 했다. 그리고 살아서 왔다.

 

 

 

 

 

          주월사령관을 역임 했던 3성장군 채명신 주월사령관은 장군묘역을 택하지          

          않고 월남전투에서 전사한 일반장병 묘역에 자기 스스로 택해 안장 되었다.

 

 

       나는, 맹호부대 제1연대 제1대대 제 4중대 관측장교로 5개월여.  포병 제60대대 A포대

       전포대장(戰砲隊長) 으로 7개월 (베트남전 참전기간 1971.6.12~1972.7.4) 동안 베트남

       전쟁에 참전을 했다. 참전 후 그렇게 이렇게 살아오며 나는, 52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참전 했다는 공로 때문에 국가 유공자로 대우를 극진히 받고 있다. 대구 보훈병원의 각 분야의

       전문의들은 내 몸 구석구석을 체크를 하며 진료를 해준다. 참 많은 고마움을 가슴에 안고 나는,

       살아가면서 그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한다.이 기회를 통해 나는 보훈병원 의료진들께 고마움을

       전해 드린다.

                                                                                                         2024.4.22. 하기,송정학

 

 

1971,11.25.오후.전투임무를 끝내고 전술기지로

 복귀하는 모습을 들춰 찾았다.    2024.4.21.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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