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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一思 석용진) 곡/선/미/감 3부·(1) 가까우면 짙고 멀면 흐릿해져도 흐름은 한결같다…경계마저 모호한 화합의 저 곡선 하늘과 땅 사이에 있으면서 두 세계를 반반씩 나눠 가진 듯…/ 땅과는 이미 화합을 했을테고 하늘과도 화합했음이니/ 장자는 하늘과 화합하는 것을 천락(天樂)이라고 했다/아무도 '원망'하지 않고 '탓'하지 않는 저 곡선…
순수시를 지향한 시인의 목소리가 산등성이를 오르내린다. 해질 녘. 그 목소리는 더 순수해진다. '아무 죄 없는 짐승'들이 편안해질 시각. 산들은 제 자리서 고향으로 돌아와 '엘레나 보다 어여쁜 꽃들'을 육질의 앙가슴에다 품고 누워 평화롭다. 시시각각. 산 그림자 짙어지고. 아무 말 없이 곡선으로 빚어진 등들을 서로 어루만지고 쓰다듬으며 혹은 비빈다. 겹겹이다. 먼 산. 가까운 산. 산들에게 원근은 뭐 그리 대수로운가. 먼 산은 먼 산대로, 가까운 산은 가까운 산대로 제 빛깔과 묵언과 질량감으로 사방을 가득 메우고 채우고 있을 뿐이다. 비슬산도 그렇고, 팔공산도 그렇고. 지리산인들 그렇지 않을까. 사람들의 발길이 흔히 닿는 국사봉에서 바라본 사방의 등성이들. 역시 가까우면 짙고 멀면 흐릿해져도 등성이들의 흐름은 한결같다. 높고 큰 산이 아니라도 그렇다. 앞산만 해도 등성이들은 있고 그 등성이들을 좀 떨어져 바라보면 뉘엿뉘엿 한결같다. 모든 일들이 이들처럼 한결같다면야. 세상은 한결 수월 할 텐데. 그러지 못하는 것은 우리들이 한결같지 못한 탓일까. 유일물첨일루(有一物添一累)라고 한 가지 일이 생기면 그만큼 번뇌 또한 늘기 마련인데. 인간사에 한결같음을 바란다는 것은 애당초 어림없는 일. 어떤 이들은 깊은 슬픔이 있을 때는 언덕길을 산책하면 가끔 마음의 위안을 받는다고 한다. 그대 또한 그런가. 그렇지만 깊은 산길을 소요하듯 걸어보면. 차분히 마음이 가라앉는 느낌도 괜찮다. 그러다 그 산을 한번 쳐다보면. 산 속에서 자신이 침잠해 있는 그 산을 쳐다보면. 비로소 어머니 품안 같은 안락함에 흐뭇해진다. 이것이 자연이다. 자연. 이미 오래전에 세네카가 말해버린 '인간에게 소요되는 바를 공급해 주는' 그 자연.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그 자연. 그래서 드라이든은 "예술에는 오류가 있을지 모르지만, 자연에는 오류가 없다"고 했다. 수긍이 가질 않는가. 하물며 인간에서 오류란. 식은 죽 먹기. 어느 날. 갓바위를 탐내며 오른 팔공산 동봉. 거기서 사방을 휘 둘러보면 시야에 드는 모든 등성이들. 하늘과 땅 사이에 있으면서 두 세계를 반반씩 나눠 가진 듯. 아니 영위한 듯. 그 모습은 자못 위대하다. 하늘과 땅을 모두 지닌 등성이들. 어렴풋이 운해가 덮이는 날이면 그 신비로움. 여기에 어떠한 인간의 고뇌나 번민이 끼워들 수 있으랴. 없다. 숭고한 정적이 깊은 심해의 그것과 맞먹고, 모든 소리를 머금은 침묵 속에 물결치는 감탄. 이미 자연과 초자연의 경계마저 모호해진다. "얼룩진 산맥들은 짐승들의 등빠디/ 피를 뿜듯 치달리어 산등성을 가자.// 흐트러진 머리칼을 바람으로 다스리자./ 푸른빛 이빨로는 아침 해를 물자.// 포효는 절규, 포효로는 불을 뿜어/ 죽어 잠든 골짝마다 불을 지르자//…떨어지는 해를 위해 한 번은 울자/ 다시 솟을 해를 위해 한 번은 울자". 박두진의 '산맥을 간다'의 부분이다. 힘차다. 불현듯 솟구치는 힘들이 육신의 곳곳에서 용틀임 하는 것 같다. 조용히 내려앉을 듯 이어지는 산등성이들을 바라보며 이 시를 되뇌어보면. 세상의 힘들이 죄다 모아지지 않을까. 움쩍도 않을 저 산들을, 산맥들을, 산등성이들을. 마호메트는 꾸짖어 다른 곳으로 옮긴다고 했다. 이적. 과연 사람들은 산이 옮겨 가는 것을 구경할 수 있을까. 그의 음성이 아무리 준엄하고 철벽같다 해도. 불호령을 내린다 해도. 산은 여전히 그 산이요, 그 산맥이요, 그 등성이인 것을. 마호메트는 역시 지혜로웠다. 산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을 산을 뒤로 하고 그는 그 스스로를 움직였다. 그리고는 산을 떠났다. 그가 있고 산이 움직여진 것이나, 산이 있고 그가 움직여 진 것이나. 그 차이는? 그래서 오늘의 중동이 저렇게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일까. 생존 화력 같은 달아오름. 중동뿐이랴. 우리들의 등뼈라는 백두대간. 종주를 꿈꾸기만 했을 뿐. 아직 용기를 내지 못했다. 오래 전. 역시 지리산인가. 만복대 정상에서 바라 본 주위의 산맥과 봉우리와 등성이들. 멀리 정령치, 성삼재, 노고단, 반야봉, 천왕봉 등. 줄줄이 그 유명한 이름들이 파노라마 처럼 펼쳐져 있고. 여기서 몇 날을 치고 올라야 백두대간을 모두 밟아볼까. 꿈같은 이야기를 스스로 해보며 하산했던 기억. 그러나 간간히 들려오는 백두대간의 소식들 중에는 안타까운 소식도 많다. 곳곳에 심한 상처투성이. 버나드 쇼가 "인간은 지구의 질환"이라고 했듯이 우리들이 질환이라면 정말 안타깝다. 가까운 팔공산만 해도 그렇지 않는가. 저 많은 유락시설에 그대들은 얼마나 많은 위안을 얻었는가. 차라리 다시 산등성이로 오르자. 등성이로 울이 쳐진 산의 둘레를 눈으로 빙 파노라마처럼 돌리면 한편의 영화나 뭐 다르랴. 김광섭이 '세상'에서 노래했듯 "산은 자유요 바람이요 고욜세/ 커서 좋고 깊어서 더욱 좋네"라고 읊조리며 그 인간의 '질환'을 반성해본다. 그래도 시답잖게 다가오는 것이 있다면 눈물의 시인이라는 박용래가 있다. "산은/ 산빛이 있어 좋다/ 먼 산 가차운 산/ 가차운 산에/ 버들꽃이 흩날린다/ 먼산에/ 저녁해가 부시다/ 아, 산은/ 둘레마저 가득해 좋다"(시 '둘레' 전문). 간혹. 먼 산을 보고, 산맥을 보고, 결국은 산등성이를 훑으며 아래 위를 순식간에 오르내릴 적에는 한없는 김광섭의 그 자유를 느낀다. 이게 자유인가. 올망졸망 이어지는 봉우리들. 시루봉도 그 한 부분. 그들이 이어지다가 어느새 등성이를 넘고. 아기자기하게 넘고. 거기에는 온갖 바위들, 호들바위, 촛대바위, 부처바위 등이 있다. 섬세하게 등성이들은 곡선으로 이어지다가. 갑자기 울룩불룩 튀어 오르기도 한다. 그러다가 다시 이어 지는 저 곡선. 유연하기 짝이 없는 곡선. 땅과는 이미 화합을 했을 테고. 하늘과도 화합했음이니. 장자는 하늘과 화합하는 것을 천락(天樂)이라고 했다. 천락을 안다는 것은(天樂知者),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탓하지 않는 것(無天怨 無人非)이라고 했다. 아무도 '원망'하지 않고 '탓'하지 않는 저 곡선! 협찬 : 한국예술대학교 |
영남일보 [김채한 기자]가 집필 게재한<2009.9.4字 영남일보> [곡선미감]을 옮겨 왔슴 / 2009.9.7 [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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