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삿날
ㅡ이중기ㅡ
꿈에 한번 다녀가라고 통기하듯 쓰고 싶었다
열두 살 아들내미 지켜보는 자리에서
문 바르고 남은 한지에다 간곡하게 적고 싶었다
일곱 번을 썼다가 구겨버리고 해질 무렵에
옆집 가서 노인에게 부탁해서 한 장 써 왔다
첨잔이 무엇이고 축문을 어찌 알았으랴
조율시이 홍동백서 들은 적 있어도 아예 몰랐다
첫제사 때 봤던 기억 없고 모조리 초면 같다
순서는 몰랐어도 정성껏 지지고 구워 한 상 올렸다
무엇보다 바나나가 풍성해서 보기 좋았다
낮에 따서 올린 복숭아 몇 개도 왠지 낯설지 않았다
아들내미 까무룩 조는 아홉 시 쯤 향 피웠다
대충 몇 번 절하고 술잔 물려 음복을 했다
지방은 타서 흩어지고 베트남 아낙 울지 않았다
들은 귀는 있었는지 열어둔 방문으로 달빛이 쏟아졌다
초저녁이라 남편 제사 하루 당겨 지낸 꼴이 되었다.
2010.10.18. 매일신문 [엄원태의 시와함께]
보아하니 한국으로 팔려오듯 시집온 ‘베트남 아낙’의 남편 기제사 얘기이군요. 지방(紙榜)을 쓰는 그 심정이
“꿈에 한번 다녀가라고 통기하듯 쓰고 싶었다” 하니, 참 애절하고 간곡하기 그지없는 사부곡(思夫曲)입니다.
“일곱 번을 썼다가 구겨버리고 해질 무렵에/ 옆집 가서 노인에게 부탁해서 한 장 써 왔다” 하니,그거 하나면
되었습니다.지방을 반듯하게 준비한 그 정성에다, “순서는 몰랐어도 정성껏 지지고 구워 한 상 올렸다” 하니,
그까짓 조율시이니 홍동백서니 하는 법도가 무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바나나가 풍성해서 보기 좋았고,
제사엔 쓰지 않는다는 복숭아도 낮에 직접 따서 올린 것이니,아낙의 눈에 낯설지 않으면 된 거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까무룩” 졸기는 해도 열두 살이나 먹은 아들내미가 있어, 우리의 베트남댁 과부는 울지 않았다지
않습니까.초저녁이라 남편 제사 하루 당겨 지낸 꼴이 된들 어쩌겠습니까.제사란 것도 어쩌면 결국은 산 사람
들의 몫일 테니까요. 엄원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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