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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오른 山 & 들녘

문경새재 정상에 오르다

by 하기* 2010. 11. 14.

 

 

 

 

 문경 새재 정상에 오르다 

 

일시 : 2010.11.10. 08:30 ~19:00

장소 :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산42-8번지 일대의 문경새재 

누가 왜 : 대구중구시니어클럽 관장(박원희)께서 숲생태사업단 숲해설사

              38명과 숲해설단 단장과팀장을 격려하고 오찬을 베풀어준후 11월 심화학습을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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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중구시니어클럽 관장(박원희)의 인사]  2010년도 한해 동안 열심히 활동해주신 여러분에 노고를 진심으로 치하 드립니다

11월 심화학습을 여러분과함께 문경새재를 다녀오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산이 있고 계곡이있고 조상의 향기가어린  문화가

   있는 곳.  문경 새재 정상에 오르면 맑은 공기와 함께 정상에서 요란하지 않아도 정말 멋진 점심을 대접하려 합니다. 감사합니다  

 

 

[숲생태 사업단 팀장(김정경)의 인사]  숲 해설사 선생님들의 왕성한 한해 활동을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숲 생태사업단 단당(한의웅)의 인사]      한해를 마무리 하면서  우리 숲해설사 쌤님들의 노고에 깊이 감사 드립니다

 언제나 큰 관심을 주시며 오늘 저희들을 격려해 주신 대구중구시니어클럽 관장(박원희)님께 고마움을  전해 드립니다 

 

 

 

문경새재는 새도 날아서 넘기힘든 고개라는 뜻으로,조령(鳥嶺)이라고도 한다.풀이 우거진 고개[草岾] 또는 하늘재와 이우리재[伊火峴]사이에 있는 고개라는 뜻에서 새재로 했다는 설과 새로[新] 생긴 고개라는 뜻에서 새재로 지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조령산(鳥嶺山) 마루를 넘는 이 재는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유역을 잇는 영남대로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사회 문

화 경제의 유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새재(鳥嶺)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옛 문헌에 초점(草岾)이라고도 하여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 또는 하늘재, 麻骨嶺)와 이우리재(伊火峴) 사이의 「새(사이)재」, 새(新)로 된 고개의 「새(新)재」 등의 뜻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뒤에 이곳에 3개(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의 관문(사적 제 147호)을 설치하여 국방의 요새로 삼았다. 이 곳은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유   서 깊은 유적과 설화·민요 등으로 이름 높은 곳이다. 이 곳에는 나그네의 숙소인 원터,신구 경상도관찰사가 관인을 주고받았다는 교귀정만 남있는 것을 1999년 중창하였고, 옛날에 산불을 막기 위하여 세워진 한글 표석 "산불됴심" 비(지방문화재자료 제226호)가 남아 있다                      

                                               

 

『문경새재』는 조선 태종 14년(1414년) 개통된 관도 벼슬길로 영남지방과 기호지방을 잇는 영남대로 중 가장 유명하며 조선시대 옛길을 대표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초점(草岾)’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조령(鳥嶺)’으로 기록된 길로 조선시대 영남도로에서 충청도(한강유역권)와 경상도(낙동강유역권)를 가르는 백두대간을 넘는 주도로의 역할을 했다.

문경새재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관도로 제1관문 주흘관, 제2관문 조곡관, 제3관문 조령관 등 3개의 관문과 원(院)터 등 주요 관방시설과 정자와 주막 터, 성황당과 각종 비석 등이 옛길을 따라 잘 남아 있고, 경상도 선비들의 과거길로서 수많은 설화가 내려오고 있는 등 역사적, 민속적 가치가 큰 옛길이다.

또한 문경새재가 위치한 주흘산, 조령산의 다양하고 아름다운 식생 경관과 옛길 주변의 계곡과 폭포, 수림터널 등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경관 가치가 뛰어나며, 문경시의 ‘옛길 걷기 체험“, ”과거길 재현“ 등 옛길과 관련한 다양한 체험 행사가 매년 개최되고 있어 현대인들이 조선시대 옛길 문화 및 선비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훌륭한 옛길 자원이다.

 

  

주흘관(主屹關)-영남제1관(嶺南第1關)

 

남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숙종 34년(1708)에  설관 하였으며 영남 제1관 또는 주흘관이라고 한다. 정면 3칸(間)과 측면 2칸 협문 2개가 있고 팔작(八作)지붕이며 홍예문은 높이가 3.6m, 폭 3.4m, 길이 5.4m이며 대문의 높이는 3.6m, 폭 3.56m, 두께 11㎝이다. 좌우의 석성은 높이 4.5m, 폭 3.4m, 길이 188m이고, 부속 성벽은 높이가 1~3m, 폭 2~4m이다.   길이는 동측500m 서측이 400m로 개울물을 흘러 보내는 수구문이 있으며 3개의 관문 중 옛 모습을 가장 잘 지니고 있다.

 

 

 

 

[조령 원터]제1관문과 제2관문 중간에 위치한 조령원터는 고려와 조선 조 공용으로 출장하는

관리들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기 의;한 공익시설이다 (지금에 여관을 뜻함) 약 600여평임

 

 

조령원터
....화봉원에서(華封院)
萬綠灰冷老居士
尙有丹心奉聖明
天下蒼生皆請祝
如何獨占華封名

만가지 인연이 재처럼 찬 늙은 거사도
붉은 마음 있어 성인 임금 받든다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축원하려는데
어찌하여 화봉의 이름 혼자 차지했는고

이규보(李奎報) <1168년~1241년>
고려시대의 문신·문인, 본관 황려(黃驪:驪興). 자 춘경(春卿). 호 백운거사(白雲居士)·지헌(止軒)·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 시호 문순(文順). 1189년(명종 19) 사마시(司馬試), 이듬해 문과에 급제한 후, 한림시강학사, 태자대보 등을 역임하였다. 호탕 활달한 시풍으로 당대를 풍미하였다. 저서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

 

 

 

 

지름틀 바위

 

 

교귀정

 

 

 

 

 

 

다람쥐가 길가에서 한가롭게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산불됴심

 

 
새재로 가는길
....(鳥嶺途中)
雉鳴角角水潺潺
細雨春風匹馬還
路上逢人猶喜色
語音知是自鄕關

산 꿩 꾹꾹, 시냇물 졸졸
봄비 맞으며 필마로 돌아오네.
낯선 사람 만나서도 반가운 것은
그 말씨 정녕코 내 고향 사람일세.

이 황(李 滉)<1501년(연산군7)~1570년(선조3)>
조선중기 학자ㆍ문신. 본관은 진성(眞城). 호 퇴계(退溪). 시호 문순(文純). 예조판서 등 역임.
영남학파 주류 형성. 저서 『퇴계전서(退溪全書)』 등

 

추색(秋色)에 젖은 가을. 이 계절을 온몸으로 만끽하기에 걷는 것 만큼 좋은 게 없다.

 

 

주흘산  비봉

 

 

조곡 폭포

 

 

조곡 폭포 앞에서의 우리들 모습

 

 

귀틀 집

 

 

[꾸구리 바위]

 

 

소원성취 탑

 

 

바위 굴

 

 

쉼터에서 숨을 가다 듬으며....

 

 

조곡관(영남 제2관)앞의 이정표

 

 

조곡관 全景

조곡관

조곡관(鳥谷關)-영남제2관(嶺南第2關)

선조 27년(1594)에 충주인 신충원이 축성한 곳으로 중성(中城) 이라고도 한다. 숙종조에 관방을 설치할 때 옛 성을 개축하였으나 관(關)은 영성(嶺城 : 3관문)과 초곡성(草谷城 : 1관문)에만 설치하고 이곳에는 조동문(鳥東門) 또는 주서문(主西門)을 설치하였다.
그후 1907년에 훼손되어 1975년에 복원하였다. 이렇게 복원한 문루를 옛 이름 조동문(鳥東門)이라 하지 않고 조곡관(鳥谷關)이라 개칭하였다. 누각은 정면이 3칸 측면 2칸이며 좌우에 협문이 2개 있고, 팔작(八作)지붕이다. 홍예문은 높이가 3.6m, 길이 5.8m이다. 대문의 높이는 3.6m, 폭 3.56m, 두께 11㎝이다. 좌우의 석성 높이는 4.5m, 폭 3.3m, 길이 73m이고, 좌우의 성벽의 높이는 2m, 폭 2~3m, 길이는 동측이 400m, 서측이 100m이다.

 

조곡관 (영남 제2관) 뒷편 모습

 

 

문경새재 아리랑 가사가 새겨져 있고 주 변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가락이 발길을 멈추게 했었다.

 

 

[상처난 소나무] V자 모양의 이 상처는 일제 말기(1943~1945)에 자원이 부족한 일본이 한국인을 강제로 동원 에네지원인

                           연료를 사용하기위하여 송진을 채취한 자욱으로서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 상처는 아물지 않고 있다.

 

 

 

귓불을 스치는 상큼한 바람에 심신이 가벼워지고 청정자연에 온몸을 맡기는 것만으로도 삶의 여유를 느낄 수 있었던 오늘이였다.

 

 

산이 있고 계곡이 있고 조상의 향기어린 문화가 있는 이 곳. 문경새재 길을  우리는 모두함께 가볍게 걸었다

 

 

조령관 [영남제3관] 정상에서 바라다 본 주흘산 비봉

 

 

 

 

조령관(鳥嶺關)-영남제3관(嶺南第3關)

새재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선조 초에 쌓고 숙종(숙종 34년 : 1708) 때 중창하였다. 1907년에 훼손되어 육축(陸築)만 남고 불탄 것을 1976년도에 홍예문및 석성 135m와 누각을 복원했다. 누각은 정면이 3칸, 측면 2칸이며, 좌우에 협문이 2개 있으며 팔작(八作)지붕이다. 홍예문은 높이 4.5m, 폭 3.2m, 길이 185m이고 성벽의 높이는2~3m, 폭 2~3m, 길이는 동측이 400m, 서측이 400m이며 대문의 높이는 3.9m, 폭 3.56m 두께 19㎝이다.

 

 

『문경새재』는 조선 태종 14년(1414년) 개통된 관도 벼슬길로 영남지방과 기호지방을 잇는 영남대로 중 가장 유명하며 조선시대 옛길을 대표한다.<세종실록지리지>에는 ‘초점(草岾)’으로,<동국여지승람>에는 ‘조령(鳥嶺)’으로 기록된 길로 조선시대 영남도로 에서 충청도(한강유역권)와 경상도(낙동강유역권)를 가르는 백두대간을 넘는 주도로의 역할을 했다.

문경새재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관도로 제1관문 주흘관, 제2관문 조곡관, 제3관문 조령관 등 3개의 관문과 원(院)터 등 주요 관방시설과 정자와 주막 터,성황당과 각종 비석 등이 옛길을 따라 잘 남아 있고,경상도 선비들의 과거길로서 수많은 설화가 내려오고 있는 등 역사적, 민속적 가치가 큰 옛길이다.

또한 문경새재가 위치한 주흘산,조령산의 다양하고 아름다운 식생 경관과 옛길 주변의 계곡과 폭포,수림터널 등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경관 가치가 뛰어나며, 문경시의 ‘옛길 걷기 체험“, ”과거길 재현“ 등 옛길과 관련한 다양한 체험 행사가 매년 개최되고 있어 현대인들이 조선시대 옛길 문화 및 선비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훌륭한 옛길 자원이다.

 

 

 

 

 

산행이 한층 여유로운 문경새재 걷기 여행은 특히 등산이 부담스러운 우리들에겐 더욱 안성 맞춤이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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