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會 모임 ( 2 )
2012.6.10.
아침 고요 수목원 탐방
청보리밭
ㅡ박이화ㅡ
도루코 면도날이 지나간 자리처럼
잘 다듬어진 잔디밭은
내 발길을 머뭇거리게 하거나 돌려세우고 만다
거울 속 면도하는 남자처럼
그만의 얼굴에 빠져 있는 듯한 잔디밭은
어쩐지 다가서기도 건드리기도 불안하다
그러나 몇날 며칠 깎지 않은 수염처럼
거칠고 꺼끌꺼끌한 보리밭을 지날 때면
옛 남자를 본 듯 반갑고 가슴 뛴다
쓰다듬을 때마다
손바닥 따끔따끔 찌르는 수염은
그가 키운 억센 야성의 그리움 같아
와이셔츠 단추를 풀듯
개망초꽃 하나 둘 풀어헤치고
등에 풀물 베이도록 와락, 그를 안고 싶어진다
그럴 때 바람은 거품 같은 구름을 풀어
비탈 전체를 밀어 버릴 듯 지나가겠지만
그럴수록 보리는 거웃처럼 무성하게 다시 일어설 테지
고랑마다 더 비리고 축축한 청보리 냄새 풍길 테지
예나 지금이나 짐승의 피를 나눈 것들은
이토록 후안무치해서
멀리 둥근 눈을 가진 새들마저
몰카처럼 찰칵찰칵 날아간다
무인모텔, 그 청보리밭 비탈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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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감적인 시선으로 세계를 새롭게 읽어내는 박이화 시인의 작품입니다. 시인의 시선에 이번에는 청보리밭이
몰카(몰래카메라)처럼 찍혔네요. 거친 사내의 따끔한 수염 같은 청보리밭에서 옛날부터 로맨스가 만들어진 것은
우리 모두가 ‘예나 지금이나 짐승의 피를 나눈 것들’이기 때문이겠지요.
이 뜨거운 피는 우리 몸속에서 들끓는 생의 욕구입니다. 자본의 힘은 이 욕구를 면도날로 다듬어 버리거나 타락된
방향으로 틀어놓았지요. 요즘 세상이 삭막해진 것은 이 따뜻한 피가 싸늘하게 식었기 때문이라는 게 시인의 진단 입니다.
시인·경북대
2012.6.30. 편집,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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