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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 詩 들

[김윤덕의 新줌마병법] 비엔나에서 온 편지

by 하기* 2013. 5. 23.

 

[김윤덕의 新줌마병법]  비엔나에서 온 편지

 

 

입력 : 2013.05.28 03:08     조선일보 오피니언(2013.5.28.)

쌈짓돈 모아 비엔나로… 나 홀로 떠난 '행복여행'
왈츠의 도시 비추던 형광불빛… 이곳에도 남루한 삶이 넘치네
슬픔도, 외로움도 힘이 된다고, 나그네들은 속삭이네


	김윤덕 여론독자부 차장
김윤덕 여론독자부 차장
다들 잘 있는지. 네 아버지는 어찌 지내는지. 늦바람 나 혼자 여행 간 마누라에 대한 노여움, 지금쯤 풀렸는지.

비엔나엔 무사히 도착했다. 두려움과 불안, 그러나 행복감 충만한 여정이었다. 이 나이에 영어 한마디 못하면서 덜컥 비행기에 올라탔으니 나도 참 당돌하지? 옆자리 남자가 대포처럼 코를 곤 것 말고는 기내식도 먹을 만했고, 좁은 좌석도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입국 심사할 때 제일 떨렸지. 네가 적어준 예상 문제와 답을 수백 번 외웠는데도 게슈타포처럼 두 눈 부릅뜬 남자 앞에 서니 머릿속이 하얘지더구나. 그 남자가 "Where are you from?" 하고 물었는데, 내가 뭐랬는 줄 아니? "I am fine thank you and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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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은 다뉴브 강변에 있는, 작지만 아늑한 곳이다. '꾸뻬씨의 행복여행'을 흉내 내자면, '행복이란 오늘 아침 반찬으로 뭘 해먹어야 할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 남이 다 만들어놓은 음식을 접시에 담아 먹기만 하면 되니 여기가 천국.

첫날엔 현지 가이드를 따라 쇤브룬 궁전에 갔다. 이곳에 살았던 왕비 중 엘리자베스란 여인이 있었는데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유럽 전역에서 그녀를 보기 위해 궁전을 찾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는구나. 아침에 눈떠 잠들 때까지 거울 보는 게 일과이고, 허리 22인치를 유지하기 위해 죽는 날까지 저녁밥을 굶었다 하니, 천하절색 부러워할 일 아니더라. 벨베데르 궁전에선 클림트의 '키스'를 보았다. 오직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명화'라는데, 오히려 나는 이 궁전 3층 구석에 전시된 '웃는 조각상'들이 좋았다. 반달눈썹을 하고 헤벌쭉 웃는 사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는 사람…. 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나오니, 스트레스 많은 우리 딸에게 주려고 엽서 한 장 샀다.

가이드가 해준 재미난 이야기 들려줄까? 오스트리아 남자 히틀러의 꿈은 원래 화가였단다. 클림트가 다닌 비엔나국립미술대에 지원했는데 두 번이나 낙방한 뒤 정치인이 되었다지. 그래서 제2차대전을 일으킨 장본인은 히틀러가 아니라 그를 떨어뜨린 미술대학 학장이라는구나. 그럴듯하지? 실은 골목골목 거미줄 전선에 매달린 형광등이 비엔나의 진짜 명물이다. 세계 최고의 음악 도시를 밝히는 남루한 불빛, 그 유쾌한 반전을 너도 보면 좋았을걸.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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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를 만난 곳은 할슈타트로 가는 관광버스 안에서였다. 비엔나에서 할슈타트까지 4시간이 걸리니, 가이드가 '사운드 오브 뮤직'을 틀어주더구나. 줄리 앤드루스는 노래도 참 잘하지. 폰 트라프 대령은 어쩜 그리 잘생겼는지. 다들 '도레미송'을 흥얼대며 즐거워하는데도, 그녀는 웃는 법을 모르는 인형처럼 창백하게 앉아 있었다.

'신이 내린 마을'이라는 할슈타트에서도 J는 혼자였다. 점심으로 송어 튀김을 먹을 때 내가 "비리지도 않고 참 맛있지요?" 했더니, 화들짝 놀라서는 고개만 끄덕였지. 다시 비엔나로 왔을 때 그녀를 데리고 슈테판 성당 근처 초콜릿 케이크로 유명하다는 카페에 갔다. 일명 비엔나커피로 불리는 멜랑시 두 잔과 케이크를 주문하고는, 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기운이 없느냐고, 이왕 떠나온 여행 즐겁게 다니라고 했더니, 별안간 J가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울더구나.

호텔로 돌아오는 길, 가랑비 날리는 괴괴한 형광 불빛 아래서 J가 물었지. "생의 한쪽 문이 닫히면 신(神)은 다른 쪽 문을 열어준다던데, 정말 그럴까요?" 이튿날 기차를 타고 프라하로 떠나는 J를 꼭 안아주었다. 우리 딸 서른 인생에도 이런 깊은 슬픔이 있었나 싶어, 목이 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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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비엔나냐고 물었니? 이 도시의 보도블록은 피아노 건반으로 돼 있는 줄 알았다. 발끝만 대도 모차르트의 선율이 울려 퍼지고, 광장엔 밤낮 없이 왈츠를 추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곳 또한 외롭고 고단한 사람들이 누추한 일상을 엮어가는 삶의 터전이더라. 파도 치는 바다가 살아 있는 바다라는 걸 일깨워주는 곳이더라. '모든 인생은 외롭지만 그래도 살아볼 만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여행일까. 사랑을 잃고 울던 J, 10년째 오페라 무대에 도전하고 있는 노총각 가이드, 궁정악사 분장을 하고 음악회 표를 팔던 링 거리의 처녀들…. 그들에게서 크나큰 위안을 얻었으니, 평생 모은 쌈짓돈을 이 여행에 투자한 것이 아깝지 않구나.

딸아, 나이 듦의 슬픔을 아니? 나 자신이 쓸모없어졌다는 자괴감, 세상은 미래를 향해 달리는데 나 혼자 과거의 시간에 갇혀 허우적대는 느낌…. 나의 노고는 당연한 듯 치부해버리는 가족들이 미웠다. 어디 나 없이 살아보라며 미지의 세계로 도망치고 싶었지.

근데 참 이상하지? 여행 와 가장 많이 생각나는 사람이 심보 제일 고약한 서방님이라니. 미움이 곪다 지쳐 연민으로 삭은 걸까? 여름 상추에 보리밥과 된장 얹어 볼이 미어터지게 먹어보고 싶구나. 집 나간 마나님 무탈히 잘 있노라, 네 아버지에게 전해다오. 미안하다 전해다오.

 

 

                                                                                     2013.5.28. 23:55     편집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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