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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參戰 그後

채명신 초대 주베트남 한국군 사령관 별세

by 하기 2 2013. 11. 26.

 

 

 
https://www.youtube.com/watch?v=R_qYL8jVCjU 
 
故채명신 장군 파월전우 곁에 묻히다.
 
 
[추억人] 我軍보다 6배 많은 월맹군 무지른 베트남戰 영웅
입력 : 2013.11.26 03:13 조선일보 A31 People & News

채명신 初代 주베트남 한국군 사령관 별세

 
목사가 되고 싶었던 소년은 6·25 때문에 성경 대신 총을 들었다. 북한군과 중공군, 베트콩을 섬멸했던 6·25와 베트남전(戰)의 영웅, 초대 주베트남 한국군 사령관을 지낸 채명신(87·蔡命新) 예비역 중장이 25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채명신 장군은 1926년 황해도 곡산에서 태어나 평양 부근에서 자랐다. 평안남도 진남포 부근에 덕해교회를 세운 외조부 박진준을 따라 목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 덕해초등학교 교사로 활동하다 1946년 북한군 사관학교 격인 '평양학원' 개교식에서 김일성을 만났다. 김일성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동무 같은 젊은이들이 필요하오. 평양으로 가 나와 함께 일합시다"라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는 생전 인터뷰에서 "그때 김일성을 따랐다면 몇 년 뒤 나의 총구(銃口)는 남쪽을 겨냥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2010년 6·25 60주년을 맞아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는 채명신 예비역 장군 사진
 
2010년 6·25 60주년을 맞아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는 채명신 예비역 장군. /오종찬 기자
그러나 그는 공산주의에 회의를 품고 1947년 남쪽으로 왔고, 그해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5기에 지원했다. 6·25 당시 그는 우리군 최초의 특수 유격부대인 '백골병단(白骨兵團)'을 이끌었다. 백골병단은 조선공산당 제2비서이자 대남 유격부대 총사령관이었던 길원팔 북한군 중장을 비롯해 빨치산 부대 참모진을 몰살시키기도 했다. 1951년 4월 초 당시 강릉 9사단 참모장이었던 박정희 대령은 채 장군을 불고깃집으로 초대해 채 장군의 피로 얼룩지고 너덜너덜해진 점퍼를 자신의 고급 점퍼와 바꾸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채 장군은 "(박 대통령이) 자기 깨끗한 옷을 내게 선물하려고 배려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때 인연으로 채 장군은 1961년 5·16에 가담했고, 혁명 5인위원회와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참여하게 됐다.

채 장군은 1965년 8월 초대 주베트남 한국군 사령관에 임명됐다. 그는 "내가 제일 자랑하고 싶은 것은 '두코 전투'와 해병 신화를 세운 짜빈동 전투"라고 말했다. 1966년 8월 캄보디아 쪽 국경 4㎞ 지점의 두코(Duc co)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맹호기갑연대 3대대 1개 중대는 자신보다 6배나 많은 월맹군 2개 대대의 기습을 막아내고 대승을 거뒀다. 아군 7명이 전사했지만 월맹군 189명을 사살했다. 1967년 2월 짜빈동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해병대 청룡부대 1개 중대는 적 1개 연대 공격을 막아내고 적 243명을 사살했다. 당시 미국 언론은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최고의 승전보"라고 했다. 그는 1969년 3월 미국 닉슨 대통령으로부터 공로훈장을, 그해 5월 남베트남 대통령으로부터 최고 2등훈장을 받았다.

 

	서울 아산병원에 마련 된 故 채명신 장군의 빈소 사진
 
서울 아산병원에 마련 된 故 채명신 장군의 빈소. /뉴스1
채 장군은 1969년 4월 귀국해 2군 사령관을 지냈다. 유력한 참모총장 후보로 거론됐지만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개헌을 끝까지 반대했고 대장 진급에서 탈락해 1972년 6월 전역했다. 전역 후에는 1972년부터 1977년까지 스웨덴, 그리스, 브라질 대사 등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문정인(84) 여사와 경덕(재미 사업가)·은하(주부)·경화(주부) 등 1남 2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 아산병원, 발인은 28일 오전 7시. 장례는 육군장으로 거행된다. (02)3010-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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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채명신 장군 유언대로 현충원 파월사병 묘역에 안장


베트남전 당시 초대 주월사령관을 지낸 고(故) 채명신 예비역 중장이 생전 유언대로 28일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베트남전 참전용사 병사 묘역에 안장됐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2015.9.3. [넓은세상]blog에서 캡쳐하여 편집 하였음  ㅡ하기ㅡ


‘죽어서도 참군인, 병사 곁에 잠들다.’

28일 오후 베트남전 당시 초대 주월 한국군사령관을 지낸 채명신 장군의 유골 운구 행렬이 안장식이 열리는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병사묘역에 도착했다.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기 위해 모여든 500여 명의 조문객은 슬픔을 감추지 못한 채 연신 눈물을 흘렸다. 유가족들의 오열 속에 하관(下棺)이 진행됐고, ‘베트남전의 영웅’이자 ‘불사조(不死鳥)’로 불렸던 고인은 그렇게 영원한 안식처에서 잠들었다.

고인의 묘지는 베트남전 당시 채 장군과 동고동락한 고 장상철 상병의 묘지 앞에 마련됐다. ‘장군으로서의 기득권을 버리고 죽어서도 전장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들과 함께하겠다’는 고인의 숭고한 뜻을 받든 결과다. 이곳은 고인이 파월참전자회장을 맡으며 베트남전에서 산화한 전우들을 추모해온 장소. 병사묘역의 면적(3.3m²)은 장군묘역의 8분의 1에 불과하다. 장군묘역에 설치되는 ‘가로 106cm, 세로 91cm, 높이 15cm’의 단(壇)도 설치되지 않았다. 묘역 앞 묘비도 다른 병사들과 똑같이 ‘높이 76cm, 폭 30cm, 두께 13cm’의 화강암으로 세워졌다.

‘육군 중장 채명신의 묘’라고 적혀 있는 묘비 앞에 헌화하려는 행렬이 길게 늘어섰다. 그와의 소중한 인연을 간직한 이들은 생전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인을 추모했다. 박희모 6·25참전유공자회장은 “고인은 부하 사랑하기를 당신의 가족보다 더 사랑하고 부하들이 목숨 걸고 싸우지 않을 수 없게 만든 훌륭한 지휘관이었다”고 회고했다.


채명신 장군의 영결식이 28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거행됐다. 가수 패티 김 씨가 조가를 부르고 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안장식에 앞서 이날 오전에는 고인의 영결식이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육군장’으로 거행됐다. 영결식에는 권오성 육군참모총장과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박세환 재향군인회 회장 등이 참석해 고인을 추모했다. 영결식은 고인에 대한 묵념과 조사 및 추념사, 헌화, 운구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베트남전 당시 자비를 털어 위문 공연을 간 것을 계기로 고인과 40여 년 인연을 맺어온 가수 패티 김 씨가 조가(弔歌)로 찬송가인 ‘내 영혼이 은총 입어’를 불렀다. 고인이 생전에 가장 좋아했던 노래다.

권 총장은 조사(弔詞)에서 “‘불멸의 군인’, ‘영원한 지휘관’ 채명신 장군님을 깊이 흠모한다”며 “장군은 오로지 위국헌신의 일념으로 국가와 군을 위해 일평생을 바친 시대의 거인이었다”고 추모했다. 이어 “장군의 뜨거운 나라 사랑의 마음과 군인정신을 잊지 않고 기리겠다”며 “큰 가르침을 바탕으로 국가방위의 소명을 이어가고 정예화된 선진강군을 반드시 이루겠다”고 다짐했다.

손영일 기자 scud20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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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채명신 장군을 보내며…
 
   
 
 
   
 
 
 
고대 로마에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는 개선장군을 뒤따르는 전쟁 포로들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끊임없이 외치는 풍속이 있었다고 합니다. 라틴어인 ‘메멘토 모리’는 ‘죽음을 기억하라’ 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는 정도의 뜻으로 해석이 됩니다. 아는 바가 적어서, 처음에는 전쟁 포로들이 곧이어 닥칠 자신의 가혹한 운명을 한탄하며 울부짖는 소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전쟁 포로의 운명은 사형 아니면 노예로 전락할 것이 뻔한 만큼, 이들의 입장에서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상식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그런데 설명을 듣고 보니, 저의 이런 상식적(?) 해석은 완전히 엉터리였습니다. 전쟁 포로들이 그토록 크게 울부짖는 ‘메멘토 모리’는 바로 영광과 환희로 인생의 최정점에 선 개선장군한테 하는 교훈의 말이었습니다.
“지금 네가 전쟁에서 승리해 우쭐하며 교만스럽게 개선하고 있지만, 언젠가 우리들(전쟁의 패배자)처럼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거나 노예로 끌려갈 때가 올 것”이라는 경고의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사자성어인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과 통하는 바가 있는 것 같은데, 감히 전쟁 포로 주제에 개선장군한테 이런 말을 하도록 하는 로마의 풍습이 놀랍습니다.
군인으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에 가장 참담한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라’는 이런 풍습이 로마를 세계 대제국으로 키운 원동력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항상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며 용맹한 장군은 나라의 기둥일 뿐 아니라 자신의 삶도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달 28일 우리는 채명신(1926~2013) 장군을 하늘나라로 떠나 보냈습니다. 사실 그동안 저는 채명신 장군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5`16 군사쿠데타의 주역이었고, 초대 주월(베트남) 한국군 사령군을 지냈다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전쟁 영웅이라는 말도 들었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달리 보는 이들도 있겠다는 생각 정도였습니다.
채 장군의 삶을 다시 보게 된 것은 ‘장군 묘역이 아닌 병사 묘역에 묻어달라’는 유언과 ‘고(故) 채명신 예비역 중장’이라는 명칭 때문이었습니다. ‘왜, 예비역 대장이 아니고 중장이지?’ ‘장군이 일반 사병의 묘역에 같이 묻히기를 원한다?’ 5`16 군사혁명(주동자 입장에선)의 동지이자 전쟁 영웅인 채 장군 정도면, ‘대장’은 물론이고 ‘국방장관’과 ‘총리’를 지내도 몇 번을 지낼 만한 인물이 아닌가. 그렇다고 채 장군이 비리에 연루됐다는 풍문조차 전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의문은 쉽게 풀렸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음에도 1972년 유신을 끝까지 반대했고 대장 진급에 탈락해 전역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적어도 채 장군에게 5`16은 권력을 잡아 출세하기 위한 쿠데타라기보다 혁명에 가까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혁명의 진정성을 그가 자신의 삶으로 보여줬으니까요.
채 장군이 자신의 뜻대로 베트남전 참전 용사들 곁에 묻힌 것은 정말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마터면 병사 묘역에 장군이 묻힌 전례가 없다는 관료주의 때문에 고인의 뜻이 훼손될 뻔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채 장군의 유언이 담긴 서신을 보고 “고인 유지대로 하는 게 맞지 않겠느냐”며 관련 부처에 지시했다고 합니다. 두 세대에 걸친 인연이 아름답게 마무리된 것 같아 다행스럽습니다.
삶이 끝난 뒤 남겨 둔 화려한 무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삶 자체가 훨씬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현대사를 보면, 진정으로 존경할 만한 인물을 찾기 어렵다는 말을 많이들 하곤 합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채명신 장군의 삶과 죽음을 생각해 봅니다. 좌우 이념을 떠나,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채 장군의 삶은 인간적으로 존경할 만하다는 생각입니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우리 현대사에 채명신이라는 멋진 장군이 있었다는 말을 전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십시오.


2013.12.4. 매일신문 [오피니언 데스크칼럼] ㅡ  석 민<뉴미디어부장>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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