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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우리나라

천년고도 경주 나들이 ( 7 ) 동궁과 월지(구<舊> 안압지) 야경

by 하기 2 2022. 1. 22.

 

 

천년고도 경주 나들이 ( 7 ) 동궁과 월지(구<舊> 안압지) 야경

 

 

 

 

경주 동궁과 월지는 신라 왕궁의 별궁터이다.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신라 경순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은 뒤, 931년에 고려 태조 왕건을 초청

하여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문무왕 14년(674)에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에 3개의 섬과 못의 북동쪽으로 12봉우리의

산을 만들었으며, 여기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진다.

                                                                                                       ㅡ(해설 다움백과사전)

 

 

 

 

 

     언   제  :  2021.11.20. 08:25 ~ 20:20

     어디로  :  경주 석굴암 석굴 ㅡ 불국사 ㅡ운곡 서원 ㅡ 옥산서원 ㅡ

                   양동마을 ㅡ 첨성대/내물왕릉 <야경> ㅡ 동궁과 월지(안압지)<야경>

     누   가  :  하기와 사우 ( 寫友 ) 2.

     어떻게  :

                    오늘 우리의 출사 계획은 천천히 경주 불국사 한 곳만의 가을 풍경만 사진에 담아 오는

                    것이었다. 함께한 일행은 이른 아침 무궁화 기차를 타고 동대구 역을 출발 경주 역을 거쳐

                    불국사 역에서 내렸다. 오늘 출사 계획이 타고 가는 개인택시 속에서 변동이 되고 말았다.

                    오늘 경주 불국사 추경만을 담겠다는 계획은 우연찮게도 커져서 천년고도 경주의 석굴암

                    석굴을 먼저 찾아보았고 그다음 불국사로 자리를 옮겨 경내를 돌아보며 즐기면서 사진을

                    담으며 나왔다. 이어서 경주의 이름 있는 유적지 다섯 곳을 돌아 나오며, 안압지 야경까지

                    사진에 담는 출사 일정을 끝내고는 늦은 밤 대구로 가는 무궁화호 가차를 타고 대구에 왔다.

 

                                                                                                                           2022.1.22, 편집.  하기

 

 

 

 

『삼국사기』에 의하면, 679년에 궁궐을 매우 화려하게 고쳤다고 하였고, 804년(애장왕 5), 847년(문성왕 9), 

867년(경문왕 7)에는 임해전을 중수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697년(효소왕 6) 9월과 769년(혜공왕 5) 3월, 

860년(헌안왕 4) 9월, 881년(헌강왕 7) 3월에는 군신들이 연회를 가졌다고 하였으며, 931년에는 신라의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王建)을 초청하여 주연(酒宴)을 베풀고 위급한 정세를 호소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별궁이었지만 신라 정국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궁궐 안에는 현재 중국 사천성 동쪽에 있는 명산인 무산(巫山)의 12개 봉우리를 본따 돌을 쌓아 산을 만들었고, 

연못을 파고서 그 안에 전설 속의 해중선산(海中仙山)인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州)를 상징하는 3개의 섬을 

만들고서 꽃을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한다. 이 연못은 바다를 상징한 것으로 보이며, 이로 인해 중심 

건물을 임해전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동궁은 신라의 태자가 머물렀던 곳이다. 특히 임해전(臨海殿)은 군신들이 연회나 회의를 하거나 귀빈을

접대하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674년(문무왕 14)에 건립하였다고 하지만,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안압지가 건립된 시기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뒤에 만들어졌다고 하였다.

 

 

 

 

 

 

 

안압지 바닥에서는 금동불상을 비롯한 금동 제품과 목조 건물의 부재 등이 출토되었고, 특수한 모습의 

기와도 적지 않게 발굴되었다. 특히 기와에는 679년인 ‘의봉4년(儀鳳四年)’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이것은 임해전터에서 출토된 680년인 ‘조로2년(調露二年)’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보상화(寶相華) 무늬의 

벽돌과 함께 문무왕 때 임해전이 건립되었음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유물로 여겨진다. 이밖에도 많은 토기류가 

출토되었는데, 신라 고분에서 흔히 발견되는 굽다리접시〔高杯〕나 긴목항아리〔長頸壺〕과는 다른 것으로 

실생활에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삼국사기』에는 임해전에 대한 기록만 나오고 안압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으며, 이후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와 조선에 이르러 이곳이 폐허가 되자, 시인과 묵객들이

연못을 보며 '화려했던 궁궐은 간데없고 기러기와 오리만 날아든다.'는 쓸쓸한 시 구절을 읆조

리며, 이 곳을 기러기 '안'자와 오리 '압'자를 써서 '안압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동궁/월지 야경투어를 마치고 정문을 나오니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모든것이 종료될때 쯤엔 허전했던 몸에다 다시 채워야하는가 보다.모두가 분주하다.

 

 

 

 

 

 

 

 

하루종일( 10시~18시) 안전하게 경주 곳곳을 우리를 싣고 돌아주었던 대절 택시 이다.

모든게 편안하게 안내해 주었던 택시기사께 고마움 전한다. 우린 경주 여행을 잘 마무리했다.   

 

2021.11.20. 촬영 :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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