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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오른 山 & 들녘

남해 금산(錦山) - 1 -

by 하기* 2009. 2. 23.

 

 

남해 금산 (錦山) -1-

 

            언   제 : 2009. 2. 17(화) 11:00~16:00

            어디를 : 경남 남해군 상주면 소재 금산(錦山, 701m)

            누구와 : 흩트러져 있는 산악회 따라서

            산행은 : 남해군 상주면 금산 주차장ㅡ샘터ㅡ사선대 ㅡ장군암ㅡ쌍홍문ㅡ보리암ㅡ정상 망대/봉수대- 

                                일월봉ㅡ화엄봉 ㅡ상사바위 앞 ㅡ흔들바위 ㅡ 농주암 ㅡ 쌍홍문ㅡ장군암 ㅡ사선대 ㅡ주차장

 

                 ♣ 높이 681m의 산으로  한려해상 국립공원의 유일한 산악공원으로 온통 기암 괴석들로 뒤덮혀 절경을 이루고 있다

신라  원효대사가  보광사라는 절을 지어 보광산이라 불려오던 것을 조선 태조 이성계가 이 산에서 100일 기도 끝에

조선왕조를 개국하게 되어 온 산을 비단으로 덮어 준다는 약속을 하였으나 조선의 개국 후 이를 실행하기 위해 중신

들과 회의를 가졌으나, 중신중 한사람이 "우리나라에는 그 산  전체를 덮을 만한 비단이 없으며, 비단으로 산을 감싼

 이후에도 몇년이 지나지 않아 누더기가 되므로 산이름을 "금산(비단금)"으로 하는것이 좋겠다고 하여 금산으로 불리

우기 시작했다.

섬 산행중 남해 금산은 조망도 좋고 산 자체가 가진 멋도 뛰어난 대표적인 산이 바로 남해  금산이다. 제주도, 거제도,

완도 다음으로 우리나라에서 네번째로 큰 섬인 남해는 '가는곳 마다 관광지'라 할 만큼 한려수도 해상 공원과 금산을

비롯,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전적지 및 유적지 등 둘러볼 곳이 많다. 이곳 금산에는 비둘기를 닮은 봉우리, 개바위,날

일(日)과  달월(月)자를 닮았다는 일월암, 자라처럼 생긴 흔들바위, 돼지 바위 등 갖가지 다른 모양을 하고 있는 기기

묘묘한 바위들이 가득하다. 대장봉, 사자암, 향로봉, 흔들바위, 쌍홍문,음성굴 등이 울창한 숲과 함께 눈 앞에 보이는

남해바다와 조화를 이루어 금산 38경을 자아 내고 있으며 산 정상에는 우리나라 3대 기도처의 하나인 보리암이 소재

하고 있어 목탁소리는 이곳 산행의 마음를 달래주고 있다.물론,남해는'망운산','설흘산','호구산'등이 있어도 모두 못

가 보았는데 의외로 금산은 옛날 몰래 산행?<근무중 무단결근후버스로다녀감>구렁이 담 넘듯 흔적없이 다녀왔기에 

선뜻 다녀와야지하는 마음에 움직이게 하였다. 오늘 함께온 산악회가 흩트러져 다시 산악회 세우기를 시도 하는것을

알면서도 산행을했다.볼것도 많고 갈곳도 많은 남해 금산의 특성상 산행 명소들을 소개위주로 산행기를 쓰려고 한다.

 

  

 

일행을 태운 버스가 출발한 시간이 17일 오전8시경,소풍 나온 초등학교 3년생 마냥 버스에 올라 설레며 싱글벙글 흥얼

거리다가 진주 IC를 지나면서 운전대 옆으로나와  버스 속에서 샷다를 눌러되기 시작했다. 이제 남해 로 접어들고있다.

 

 

‘남해대교’ 가 눈에 들어왔다.‘남해대교’는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와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사이를 연결한

다리로,길이 660m,폭 9.5m, 높이 52m의 규모를 자랑한다.1968년 착공하여 1973년 준공된 한국 최초의 현수교다

 

 

남해 설흘산 全景 

 

 

노도 서포 김만중의 유배 유적지ㅡ

 

노도는  먼 옛날 배 들이  바다를 건널때 노 가 부러지면  이곳에서 머무르면서 참 나무로 노를 고친후 다시 항해

했다는데서 이름이 유래되었는데 멀리 바다 저 편에서 바라보는 노도는 삿갓을 연상하여 '삿갓섬"이라고도 한다.

이씨조선 시대에 서울에서 가장 먼 땅의 하나인 동시에 천혜의 유배지였던 남해도의 남쪽에 있으며 그곳에서

10분 정도 가야 도착한다.주민들은 대부분 어업에 종사하지만 농사를 짓는 사람도있다.섬 전체가 바다로 둘러

쌓여있고 물이 매우 맑아 낚시꾼들이 많이 찾는다....................................................................................

 

서포 김만중이 당파싸움 와중에 53세되던 1689년 박진규(朴鎭奎)이윤수(李允修)등의 탄핵으로 유배되여 3년간

지낸 곳으로 그가 살던 초옥터 샘터등이 이 노도에  남아있다. 서포 김만중은 이곳에서 유배되여 살면서 스스로

옹달샘을파서 물을마시고 솔잎 피죽으로 연명하면서 구운몽(九雲夢)과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썼고 1997년

남해군 문화원에서 주변을 정리하고 안내문을 설치 하였다......................................................................

 

구운몽(九雲夢)은 남해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숙종15년 (1689년)에 지은 남해 유배시(53세) 작품으로  김만중이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쓴 것으로 전문을 한글로 집필하여 숙종때 소설 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는 후대 소설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른바 가정소설이라는 유형의 고전소설들이 대개

가문 안에서 처와 첩의 갈등을 그려내는 것인 바,그 기본틀이 이 작품에서 마련되었던 것이다.가정소설보다 이야

기가 더 확대,부연되는 가문소설의 경우에도 처첩갈등은 기본화소로 자리잡는데, 이 역시 이 작품의 영향을 받았

다고 할것이다...................................................................................................................................

 

서포 김만중은 사계 김장생의 증손으로 1637년(인조 15년)에 피난길의 배 위에서 태어났다.병자호란(1636-37년)의

와중에서 강화도가 함락될 때 그의 아버지 김익겸은 자결하고, 어머니 윤씨 부인이 배를 얻어 타고 피란 가던중에

배 위에서 낳았던 것이다.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을 평생 한스럽게 여겼다.김만중은

14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고 16세에 진사 일등을 하고,29세(1665, 현종 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

하였다.지평,수찬,교리,헌납 등의 벼슬을 역임하면서 임금에게 간언을 많이 하였다.후에 공조판서,대사헌, 대제학

등 고위직을 역임하게된다.그의 형 김만기는 장녀를 숙종의 비 인경왕후로 들여서 광성부원군이 되었다.이 집안은

국왕의 외척이 된 것이다.김만기는 늘 자기 집안이 일어난것이 모두 어머니 덕분이라고 말하여왔다.서포 김만중이

살았던 시대는 당파 간에 권력다툼이 치열했던 조선 중기였다.서인과 남인으로 갈려서 이념논쟁을 벌여 정국의

도권을 뺐고 빼앗기는 국면이 여러 차례 연출되었다. 서포는 그 증조부가 사계 김장생 인고로 그 후학인 송시열이

서인의 반열을 걸었음으로 서포 김만중도 서인의 반열을 걷게 되었다.그런 중에 한 쪽이 정권을 잡게되면 다른 쪽

인사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귀양가게 되고, 정국이 뒤바뀌어 처지가 역전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그는 증조부김장생의 제자였던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임금 앞에서 송시열, 송준길

서인을 적극 옹호하고, 허적, 윤휴 등 남인을  날카롭게 비판 하였다.그러다가 때로는 임금의 진노를 사서 귀양을

가기도하였다.정계에서 서포 김만중의 진로는 그가 속한 서인의 그것과 행보를 같이하였다.그의 시대에 있었던 최

대의 이념논쟁은 상복 입는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효종이 돌아가셨을 때  대비 조씨가 어떤 상복을 입는가의

문제에 대해, 서인의 주장이 받아 들여져 남인들이 물러나게 되었다 그 후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가 돌아가셨을 때

예전  문제가 다시 불거졌는데,  이번에는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서인들이 쫓겨 나게 되었다. 이 해가 1674년

(숙종 1년)입니다.동부승지로 있던 그는 이듬해에 삭탈관직 되었다가 1680년(숙종 6년)에 허적,윤휴 등 남인이

각함으로써 복권되었다.그 후 서인 집권기에 주요 고위직인 대제학의 지위에서  7, 8년을 지낸 후인 1687년, 후에

희빈이 된 장씨와 관계된 일을 간언하다가 숙종의 진노를 사게되어 함경도 선천으로 유배되었다.그 해 3월에는 형

김만기가 서거하였습니다.집안에 한꺼번에 우환이 닥친 것이다.선천 귀양지에서 윤씨부인의 생신을 맞이하여 지은

시에서,“멀리 어머님께서 아들을 그리며 눈물 흘리실 것을 생각하니, 하나는 죽어 이별이요 하나는 생이별이로다.

라고 읊었습니다.이러한 아픔속에서 선천의 유배지에서 그는 어머니 윤씨를 위하여 순 한글 소설 구운몽>을지었다.

이듬해인1688년11월에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얼마후에 다시 남해의 노도로 유배되면서 귀양살이의

중형인 위리안치 되었다.위리안치(圍籬安置)란 죄인이 귀양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ㅡ

노도 유배지 초옥에서  사씨남정기를  집필한것으로 전해온다. 특히 <사씨남정기>는 양반사대부의

정부인이었던 사씨가 자식을 낳지 못한 관계로 교씨라는 첩을 맞아들인 것이 화근이 되어 온갖 고

생을 다하다 나중에는 교씨의 악행이 탄로나 처형되고 남편과 다시 만나  백년해로(百年偕老)하였

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작품은 인현왕후를 내치고  희빈 장씨를 중전의 자리에 앉힌 숙종의

처사를 소설이라는 형식을통해 비판한 것으로 훗날 숙종의 마음을 돌리는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이곳 노도에서 어머니의 부고를 듣고 피눈물을 흘렸고, 그 충격과 풍토병으로 인해

1692년(숙종 18년) 4월 유배지에서 영면하였다.그의 사후인 1694년,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자

관작이 복구되었고, 1706년에는 정표가 세워졌다. 

                                                                                      자료제공 : Naver 지식iN

 

 

한려해상 국립공원 금산을 알리는 표지석

 

 

출발한 금산 탐방 지원쎈터에서 부터  한동안은 완경사의 돌길이 이어진다. 바윗덩이들을 보도블럭처럼 평평하게

깔아둔 길이 널찍하게 나있다.   오늘 산행은  쌍홍문ㅡ보리암ㅡ금산정상ㅡ화엄봉ㅡ일월봉ㅡ흔들바위ㅡ제석봉ㅡ

화엄봉ㅡ상사암 앞을 돌아 쌍홍문을 다시 거쳐 하산 할 것이다.

 

 

주차장에서 올려다 본 금산.금산이 부른다.오늘 우리가 오를 저 암봉들이 금산입니다.곰씨님의 경쾌한 가리킴이가볍다.

 

 

쌍홍문 앞에서 내려다본 남해 상주 해수욕장

 

 

쌍홍문 

 

금산 탐방 지원센터를 지나 한동안은 완경사의 돌길이 이어진다.  바윗덩이들을 보도블럭 처럼 평평하게

깔아둔 길이 널찍하게  나있다. 돌탑을 지나고, 계곡을 오른쪽으로 건너면서 경사는 가팔라진다. 급경사

돌계단길  - 길 왼쪽에 거북 형상의 바위로 만들어둔 샘터- 샘터 이후 20분 남짓 한결 가팔라진 돌계단을

오르면 거대한 쌍바위굴이 나타난다. 이것이 금산 비경지의 관문격인 쌍홍문이다. 윗부분이 무지개 형상

 처럼 된 문을 홍예문이라 하니,곧 쌍홍예문이라는 뜻이다.쌍홍문을 지난뒤,방향을 왼쪽으로 돌면 화봉.

우측으로 잡으면 보리암이다

 

 쌍홍문 (雙虹門)은 고운 쌍무지개를 뜻하는 이름이지만 첫인상은 해골을 보는 것 같은 기괴한 모습이다. 

멀리서 보면 두 개의 구멍이 ‘뻥’ 둘려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장군암이 있다. 장군암에는 희안하게 송악

나무가 암벽 타듯이 올라 가 있다.쌍홍문을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하는 장군암과 동서남북에 흩어져 있던

네 신선이 모여서 놀았다는 사선대가 함께 모여 있다.

 

 

 사선대 (四仙臺).동서남북에 흩어져 있던 네 신선이 모여 놀았다는 뾰족한

암봉이지만 자세히 보면 네 조각의 기암이 하나의 암봉을 이루고 있다.

 

 

쌍홍문(雙虹門) 안에 발을 들여 놓았다.우리는.

 

흡사 해골 형상이지만. 무지개 형상의 홍예문이 두 개라 해서 붙여졌다 하고....하여튼 간에, 그 중 한 문을

통과하고 있다세 사람은,행복한 모습을 머금은 체...왜 너희들만은 금산엘 갔는냐고 물어 온다면 이렇게

하려 한다.자신있게 이렇게 금산이 좋아서 왔다고...으스러질 것 같은 번거로움을 떨쳐 버릴수있는 시간을

갖고파 졸라서 오래전에 오늘을 얻어내곤 우리는 이렇게 힘차게 함께 왔다고.......................................

 

밀양 구만산 초입 좌측 산등성이에도 이와같은 굴을 볼수 있으며 사바세계를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일명

해탈문 이라 불리우고 있으며, 쌍홍문 등로는 좌측굴로 들어가 우측굴 위쪽으로 나가게 되어 있다. 

 

 

 쌍홍문  안벽에는 구멍 세 개가 나란히 뚫려 있는데,  누구든 돌멩이를 구멍마다 던져 한번에 다

  넣게 되면“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발길을 멈추고 돌을 던져 보고 가기도한다.

 

 

자연의 조화는 참 묘함을 오늘 알게 되였다.....

 

 

쌍홍문(雙虹門)은 고운 쌍무지개를 뜻하는 이름이지만 첫인상은 해골을 보는 것 같은 기괴한 모습과는

달리 통과한후 지나온 입구를 내려다 보니 그렇게 마음이 뻥 뚫린것 같아 가슴이 가벼울 수 가 없었다.

 

 

 해탈문

해탈문을 지나 정상을 향해 올라야 했다.....짧지만 구석구석 다보고 가리라 마음 먹었지만 그래도 몇군데는

보지 못하고 가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해탈문 저너머 정상 이곳 저곳 오르고자 한다. 하마 온갖 속세의 풍파

일랑 이곳 금산 보리암과 암봉들에게 털어놓고 가려 몇번이나 뒤에 묻어 따라오나 싶어 뒤돌아보고 또 돌아 

보는걸 보면 아직 세상과의 인연은 끊어지지 않았나싶다, 하지만 저 해탈문을 지나므로 인해 잠시나마 속세

의 묻은 때를 벗어 낼수 있으리란 마음 하나만 해도 오늘의 산행효과는 크다 할것이다.............................

 

 

쌍홍문 바로 앞에서,바라본 쌍홍문을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하는 장군암.

장군암을 뒤덮고 있는 송악 나무 덩굴이 암벽 타고 올라가 사시사철 저렇게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다.

 

 

장군봉 을 휘감아 올라간 늘 푸른 덩굴식물  송악

 

 

쌍홍문을 지난 뒤, 방향을 오른쪽으로 잡으면서 머리를 들어 위를 보면  처마 끝이보인다. 

바로 보리암 이다.시계 방향으로 돌아 2백여보 오르면 그 유명한 보리암 앞마당에 이른다.

 

 

모습들  

 

 

 보리암의 3층석탑 


보리암 앞 탑대 위에 있는 3층 석탑(경남 유형문화재 제74호)은 기이한 전설을 지니고 있다.
김수로 왕비

허왕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바사석 으로 김해 구지봉 아래 호계사에 세운 탑을 원효대사가 이곳으로 옮겨

왔다는 이야기가 있다.또 허왕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부처님 사리를 모시려고 원효대사가 이 탑을 세웠

이야기가 있으나 실제로는 고려 후기 양식의 탑이라 한다.  이 탑이 신비스러운 것은 나침판을 놓으면 

나침판 바늘이 남북을 가리키지 못하고 방황한다는 것이다.밤에는 종종 이 탑이 빛에 싸인다는 이야기도

있다. ........................................................................................................................(월간산)

                    

3층 석탑이 선 자리가 탑대라 하여 또한 38 경중 하나다.사람이 키를 견줄 만큼 자그마한 3층석탑은 그러나

신비한 기운이 서려있다.      하단부 남쪽 면에 나침반을 대보면 자침이 남과 북을 정반대로 바꾸어 버린다.

석탑 하단부의 석질이며 석탑 부장품을 조사해 보아도 자성이 없었다고 하니,신기할 뿐이다.대장봉,보리암

법당을 거쳐 내리닫던 금산의 기운이 석탑 기단 남쪽의 바위벽에 부딪쳐 방향을 180도 바꾼 탓이라고 말 하

이도 있다.이 탑대에서 사방 경치를 관망하고는 부지런히 금산 정상으로 발길을 재촉했다.........우리는.

 

 

 모습 1

 

 

보리암

보리암은 동해의 낙산사 홍련암,  서해의 석모도  보문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으로 꼽히고 있다

보리암은 금산 38경의 명소에 둘러싸여 있어 더욱 돋보인다.  위로 우람한 대장봉이 있고, 아래에 탑대가

 받치고있으며, 발치에 금산 제1의 명소 쌍홍문이 있다. 오른편에 화엄봉과 일월봉, 왼편에 삼불암이 늘어

 서 있고, 건너에 거대한 상사바위가 보인다. 뿐만 아니라  세존도 등 섬들이 점점이 떠있는 그림 같은 상주

 앞 바다를 굽어보고 있고 그 너머로 망망대해를 그윽이 바라보고 있다. 보리암은 불교 남방 전래설의 예가

 되고 있는  가락국  김수로왕의  왕비인 인도 아유타국 허황옥 공주의 삼촌이 되는 장유선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신라의 원효대사가  강산을 유람하며  다니다 금산이  방광하듯 온 산이 빛나는 것을 보고 보광사를

짓고 산을 보광산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법당 뒤에  층암절벽을 이룬  거대한  암봉이 대장봉, 그 왼쪽 아래, 흡사  좌대에  올려둔 것 같은 구슬 모양의

둥근 바위는 농주암,그 왼쪽에 농주암을 옹위하듯 솟은 암봉은 그 형상이 화려한 꽃과 같다는,혹은'화엄(華嚴)'

두글자 같다는 화엄봉이다.       사방  어디를  보아도  절경 아닌 데가 없는  바로  이곳이 명당이  아닌가 싶다.

 

 

 모습 2

 

  2  월 

 

 "벌써" 라는 말이

2월 처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새해 맞이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월,

지나치지 말고 오늘은

뜰의 매화 가지를 살펴 보아라.

 

항상 비어 있던 그 자리에

어느덧 벙글고 있는

꽃,

 

세계는

부르는 이름 앞에서만 존재를

드러내 밝힌다.

 

외출 하려다 말고 돌아와

문득

털 외투를 벗는 2월은

현상이 결코 본질일 수 없음을

보여주는 달,

 

"벌써" 라는 말이

2월만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ㅡ  오세영 詩人의  2 월

                            

 

보리암 처마끝 아래 오늘 함께 금산에 오른 허비 곰씨 하기 모습.등 뒤로 펼쳐진 남해 바다 섬들이 아름답다.

 

 

금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평온한 남해 금산 보리암 全景

한려 해상 국립공원 안에 있는 유일한 산악공원인 남해 금산 (681m)은 기암 괴석으로  뒤덮여 있었다

대장봉, 사자암, 향로봉, 흔들바위, 쌍홍문, 상사암 등이  바다와 조화를 이루며 금산38경을 자아 내고

있었다. 비둘기를 닮은 봉우리,개바위,날일(日)과 달월(月)자를 닮았다는 일월암, 자라처럼 생긴 흔들

바위, 돼지바위 등 갖가지 모양의 바위들이 가득하다.금산정상에서 내려다본 남해바다.한눈에 들어와

우리를  반겨주었던 사량도 섬. 산 정상 8부 능선에는 우리나라 3대 기도처중 하나인 저 위에 보리암이

평온했다. 산행은 상주해수욕장 인근 상주리 상가 주차장에서 시작 되었으며, 경사가 급한 편이 었다.

총 산행시간 약 3시간이면 충분 하였으나  모든 암 봉을 돌아보려면 2시간 정도면 되리라 생각한다.시

간에 쫒겨 상사암  정상을  밟지않고  앞을  지나치며 모습만 앵글에 담은게 그렇게 서운할 수 가 없다

하지만 항상 산행에서는 그렇게 한가지씩 미련을두고 내려와야 다시 그곳을 가야한다는 언약을 맺는

것 일거라 생각을하며 위안을 삼으려한다.다음에 또,한번은 꼭 다시 오리라 하면서........................ 

 

금산산행 2편에서는 돌아본 금산정상과 이곳 저곳 암봉들 준비해 보려한다.

  함께 산행해준 허비님 곰씨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2009.2.21         하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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