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베트남參戰 그後

베트남전때 양민학살?...좌파의거짖말

by 하기 2 2011. 8. 2.

 

[정전협정 58주년 주간 연재] "베트남전 때 양민학살?… 좌파의 거짓말"
  • 조선블로그

입력 : 2011.08.02 03:03

 

사진은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군국인과 울부짖는 베트남 모자의
모습. /제공=뉴스위크지

국군, '물· 고기'  분리 전술

베트남에서 미군과 한국군의 전술은 확연히 달랐다.  당시 베트남 국민 다수는 호치민(胡志明)을 지지

했다. 그는 프랑스와의독립전쟁  영웅이었으며 부패와 불교도 억압으로 얼룩진 고딘 디엠 정권과

불퇴전의 용기로싸우고 있었다.    베트남은 초대퍼스트레이디 '마담 누'의 망언으로 국민의 반감을

샀다.본명이쩐레수언인 '마담 누'는 군사정권 독재에 맞서 승려 틱꽝덕이분신하자 '인간 바비큐'라고

비아냥댔다. 그 후 베트남의 양민은 베트콩 편으로 돌아섰다.                                               

그들은 앞에선 웃다 미군이 등만 돌리면 총을 쏴대거나 수류탄을 던졌다. 거기 당한 미군은 양민,

베트콩을 가리지 않고 섬멸하려 했다. 내 생각은 달랐다. 마오쩌둥의 말처럼 '물(양민)'과 '고기(게릴라)'

를 분리해야 했다.                                       

국군은 '베트콩 1만명을 놓쳐도 양민 1명을 구하자'는 자세를 취했다.의약품 부족으로 고통받는

월남민을 위해 의료활동도게을리하지 않았다.베트남전 때 우리가 만행(蠻行)을 저질렀다는 좌파들이 많다.

그건 터무니 없는 거짓말이다.한국군은 마을수색 때 제일 연장인 촌장(村長)에게 공손히 대했으며

야간작전 때 주민들에게 '절대 움직이지 말라'고 사전경고했다.    외교관계가 회복될 때 베트남정부가 당시

한국군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다.                                          

 

...............................................................................................................

[정전협정 58주년 주간 연재] 한국군, 6·25 이후 첫 독자적 작전권 행사했다

 

입력 : 2011.08.02 03:03 / 수정 : 2011.08.02 11:09

 

 "용병 논란, 말도 안돼"

"채 장군, 고생한 김에 한번 더 부탁하고 싶은데 한국군이 베트남에 가면 잘 싸울 수 있을 거야. 어떻게 생각해?"
"각하, 우리 군이 6·25 전쟁 후 훈련을 잘 받아 강군(强軍)이 됐다는 말씀은 옳지만  월남전을 절대 낙관하시면

안 됩니다."                                                                                                                             
1965.4월 청와대. 박정희 대통령은 내 말에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뜻밖이군. 채 장군 말대로라면 우린 나가   

보지도 못하고 패배하겠군." "그게 아니라 더 치밀히 연구해야 한다는 뜻." "그러니 적임자는 임자야, 잘 연구해봐."

맹호부대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두코전투에서 승리한 9중대 2소대 이종세 상사에게 태극무공훈장을 달아주고 있다. 이 상사는 소대장이 부상을 당하자 소대를 지휘하며 월맹군을 물리쳤다. 사진 왼쪽이 채명신 파월한국군사령관이다.

 

대통령은 화가 나면 손을 떨었다.거기 신경쓰여 확실히 의사를 표시하지 않은 게 나의 베트남행을 결정했다.

문제는 작전지휘권 문제였다.대통령은 이미 브라운 주미대사에게 한국군을 미군의 지휘 아래 두겠다는

언급을 했다고뒤늦게 말했다.                                                                                                                           

는 버텼다. "각하, 주권국가의 군대로 파견되면서 미군의 지휘를 받으면 떳떳하지 못합니다.  나중에 용병(傭兵)

이라는 누명을 쓰면 더 억울합니다." 담배를 쥔 손을 덜덜 떨던 대통령이 되물었다. "그럼 대체 어쩌자는 말인가?"

대사는 특명전권을 갖는다.대사에게 대통령이 한 말은 미 정부에 정식통보한 것과 같다.고민하다 대통령에게 꾀를

냈다. "브라운에게 사령관으로 절 임명했다고 슬쩍 언급하면서 주월미군사령관에게 협조를 부탁한다고  해주십쇼!"

파병 후 나는 파월한국군사령관으로서 주월미군사령관 웨스트모어랜드에게 '독자 작전권'을 갖겠다고 말했다.예상

대로 웨스트모어랜드는 '절대 안 된다'며 화를 내면서 코웃음을 치기도 했다. 나는 30분간 그들에게 일장연설했다.

"당신들이 B52 지원을 받아 석달동안 부락 하나 장악한 게 있나.월남전은 정치전쟁이다. UN군이나 월남군이 지휘

한다면 명분이 있지만 미군지휘를 받으면 청부전쟁이란 소릴 듣지 않겠느냐.  물론 100% 내 식대로 하겠다는 건

아니다."                                                                                                                                    

중이 조용해졌다.당시 미군 지휘부 중 제일 까다로운 이가 라슨 장군이었다.   그 는 6·25에 참전했었다. 그런 그가

벌떡 일어나더니 악수를 청해왔다. 만일 그때 우리가 독자지휘권을 확보하지 못했으면 훗날 두고두고 말썽의 소지

가 됐을 것이다.                                                                                                                           

                                 

2011.8.2. 조선일보 특별기획 [영원한 사령관 채명신의"내가 겪은 전쟁"]<下. 끝>  옮김

 

 

댓글